2012. 3. 26. 18:3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역(驛), 글쟁이 김시만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만 역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急行列車)가 어지럽게 경적(警笛)을 울리며
지나간다.
- 한성기. 「역(驛」에서,
경희대 국문과 82학번에 ‘시만’이가 있었다.
82학번 남학생 중에 대부분은 중간에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를 해서 나와 4년을 같이 지낸 사람이 거의 없는데 시만이는 병역을 면제받아 나와 4년을 함께 지냈다.
82학년 국문과 신입생 중에 나이가 나와 같은 사람이 셋이 있었고 나보다 두 살 위인 형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재수를 해서 들어온 학생들이 대여섯 명인데 거기에 시만이가 있었다. 나이가 좀 많은 우리 넷(한 사람은 여자여서 같이 어울리지 않았다.)과 재수생들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 온 학생들 해서 세 팀이 있었는데 시만이는 이 세 팀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생각이 좀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오지랖이 넓은 것인지 안 끼는 곳이 없고 그렇다고 어디서나 환영을 받지도 못하는 특이한 존재여서 당시 국문과 82학번에서는 ‘시만스럽다’와 ‘시시하고 만만하다고 시만이가 아니다’라는 두 격언(?)이 존재했었다.
시만이는 동급생뿐만 아니고 상급 학생들에게 가서도 잘 어울렸는데 유별난 외모와 특이한 말투 때문에 한두 번 본 사람은 누구든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건 나중에 들어온 신입생에게도 마찬가지였고 타 학과 학생들에게도 통하는 것 같았다.
키는 180cm 쯤 되는 것 같고 체중은 60kg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마른 편인데 걸음걸이가 약간 휘청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말은 서울 사람치고는 꽤 느린 편이고 앞말과 뒷말이 잘 이어지지 않아서 듣는 사람이 늘 답답하고 궁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렸을 때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을 번 하다가 살아났다는데 그래서 몸과 머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었다. 머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다만 말하는 것이 어눌해서 그런 얘기가 떠돌지 않았나 싶다. 이 교통사고 후유증이 시만이에게는 부적과 같았다. 웬만하면 그 얘기를 기억하면서 한 수 접어서 봐주었기 때문이다.
시만이 나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서너 살 차이는 다 말을 놓았고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서는 꼭 ‘형’ 대접을 받는 특이한 처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형’이라는 단어는 꼭 쓰지만 항상 반말 비슷한 어투였다. 그리고 복학생들과 잘 어울렸는데 거기서도 형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좀 자유로운 영혼인 것인지 아니면 조금 모자란 것인지 분간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시만이는 누가 자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기가 가고 싶은 자리, 끼고 싶은 자리는 어디든 휘젓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눈총을 주었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자기마음대로였는데 그게 시만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낄 때와 안 낄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빠질 때 빠져야 하는데 빠지지 않고 별 득도 없는데 아무 자리에나 꼭 끼는 사람을 ‘시만스럽다’고 했던 것 같다.
후배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시만이는 후배들과도 잘 어울렸다. 82학번 때는 졸업정원제가 처음 시행이 되어서 국문과에 입학한 학생이 80명이었고 그 뒤로도 몇 년은 계속 그만큼 신입생이 들어와서 같이 한 해를 다녔어도 서로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시만이가 모르는 선배나 후배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시만이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 대꾸해주고 챙기는 편인 나를 잘 따랐다. 내가 시만이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온 적이 있었다. 3학년 때 여름방학인가였는데 자꾸 자기 집에 가자고 졸라서 을지로에 있는 시만이 집에 가서 어머님과 누님께 인사드리고 하루 자고 아침밥을 먹고서 왔다. 그때 시만이 어머님께서 시만이가 어려서 교통사고를 당했던 일과 지금 대학에 잘 다니고 있어서 큰 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시만이를 잘 살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런 일이 여러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졸업하고 2년인가 지난 뒤에 시만이가 결혼을 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반가워서 꼭 가겠다고 하고 명동성당 결혼식장에 갔더니 우리 선생님께서 시만이 결혼을 축하해주러 오셔서 뵈었다.
그날 선생님께 들은 얘기는 조금 놀라웠다. 시만이 장인이 되시는 분이 선생님과 어릴 적에 이웃에 살던 형님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시만이가 결혼한다고 선생님댁으로 신부가 될 사람과 인사를 왔었는데 얘기를 나누다보니 고향이 상주였고 좀 더 얘기가 되다보니 오래 소식을 몰랐던 시골 형님의 따님이라는 것을 아시게 된 거였다.
사실 시만이가 별 탈 없이 국문과를 졸업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리 선생님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시만이가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야 전혀 없지만 우리 선생님이 늘 살펴주시고 챙겨주시어 제대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시만이는 어머니가 하시던 판촉상품매장을 물려받아 잘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경희대 행사가 있으면 시만이가 납품을 할 때가 많다고 했다. 졸업한 뒤에도 학교 행사에는 꼭 참석을 해서 많은 관계자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고 이런 관계를 사업에 잘 활용한다는 얘기가 들려 왔다. 아주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누가 복도에서 내게 손을 흔들길래 놀라서 보니 시만이였다. 수업시간에 이 무슨 일인지……. 놀라서 나갔더니 김포공항에 다녀오다가 내가 보고 싶어서 학교로 찾아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술 한 잔 하자고 하길래 수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오늘 학교에 일이 있어서 술을 마시러 나갈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냥 훌훌 털고 가버렸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시만이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했지만 시만이는 더 그랬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인지는 모르지만 시만이가 많은 시간을 장례식장에서 보내면서 거기 온 동기들과 후배들을 챙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고 삐삐를 쓸 때라 누가 나에게 연락을 하려면 번거로웠는데 시만이가 여러 차례 삐삐로 연락을 해서 2007년 8월 15일에 시만이와 만나 시안공원묘지에 처음으로 선생님께 참배를 갔다. 시만이가 6월 17일 장례식에 참석을 하여 선생님 묘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해 날을 잡아 둘이 묘소에 간 것이었다. 시만이는 5월 15일에 혼자서 성묘를 왔었다고 해서 놀랐다.
그날 둘이 서울에 와서 술을 마시고는 또 한동안 연락이 없이 지냈다. 아니 시만이가 가끔 연락을 했지만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술자리를 오래 끌면서 자리를 옮겨 다니는 것이 아주 질색인데 시만이가 꼭 그래서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시만이가 병원에 있다고 연락을 해서 두 번 문병을 간 적이 있다. 2014년 7월 28일에 서울대병원으로 찾아갔더니 뇌경색인가로 쓰러져서 입원했다고 했다. 내가 찾아갔더니 아주 반색을 하면서 어떤 여자가 곧 찾아올 것이니 나가서 술 한 잔 하자고 하여 내가 질겁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녀석이 또 무슨 술이냐고 화를 내서 술자리는 가지 않았고 처음 보는 여자와 셋이 커피를 마시고 왔다.
그 뒤에는 또 홍제동에 있는 정형외과에 다리 골절로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 와서 찾아갔다. 멀리도 아니고 홍제동에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가서 얼굴은 봐야할 것 같아서 갔던 거였다. 그런데 다리가 골절이 된 것이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넘어져 그런 것이라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 녀석이 왜 그런 곳에 가서 다쳤나 싶어서 밉살스러웠다.
내가 시만이와 함께 시안공원묘지에 다녀 온 뒤로는 내가 매년 1월 1일과 5월 15일, 6월 15일 전후에 선생님 묘소에 다닌다. 내가 5월 15일에 가서 보면 누가 선생님 묘 앞에 작은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가져다 놓은 것이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일찍 가서 보지 못하고 온 적도 있는데 6월 15일께에 가서 보면 시든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꼭 있었다.
나는 내 주변에 아는 사람, 혹 영희나, 순희가 아닐까 생각을 하다가 한참 지난 뒤에 그런 얘기를 했더니 미경와 순희, 은경이가 내린 결론이 ‘시만’이였다. 그렇게 듣고 보니 정말 시만이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다 떠올려봤으면서도 그 꽃바구니를 가져다 놓은 사람이 시만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2017년 6월 17일에 연희동에서 시만이를 만났다. 만나자고 여러 차례 전화가 왔는데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또 미루다가 만난 거였다. 그날 술을 마시면서 시안 선생님 묘소의 꽃바구니 얘기를 물었더니 자기가 가져다 놓은 거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숙연했다. 국문과에서 선생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그리고 소위 출세를 한 사람도 여럿이지만 누구 하나 스승의 날에 선생님 묘소에 카네이션을 들고 갔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는데 시만이가 해마다 왔었더니 눈물이 나게 고마웠다.
그날 시만이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시만이는 대학에 다닐 적에 노강 선생님께 자주 빵을 사다가 드렸다고 해서 또 놀랐다. 나는 대학에 다닐 적에 노강 선생님께 한 번도 음식 대접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1월 1일과 5월 15일에 찾아뵈었을 뿐인데 시만이는 대학 다닐 적에 그랬다는 것이다.
시만이는 또 우리 국문과 은사님, 박노춘, 황순원, 서정범, 김태곤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적에 꼭 조문을 갔었다고 했다. 물론 나도 그랬지만 시만이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 너무 놀랍고 너무 고마웠다.
어떻게 생각하면 국문과 82학번의 천덕꾸러기였고, 또 남들이 우습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시만이가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였던 것이다. 나는 시만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만이를 절대 싫어해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만이는 자신을 ‘글쟁이’라고 소개한다. 나는 그런 시만이가 좀 엉뚱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는 글쟁이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 고우리 결혼식 (0) | 2012.03.26 |
---|---|
유리창(琉璃窓)Ⅰ, 은덕이 영면하다 (0) | 2012.03.26 |
저문 날의 생각, 박지연 선생님 (0) | 2012.03.26 |
인동(忍冬) 잎, 언제나 중기 (0) | 2012.03.26 |
능금, 돈키호태는 아니어도 (0) | 2012.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