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6. 18:4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고우리 결혼식
외로운
별 하나가
역시
외로운 별 하나와
만났다.
세상에 빛나는 별
두 개가 생겼다.
-나태주, 「결혼」에서,
선생님 장녀인 고우리 양이 2012년 8월 25일에 강동웨딩문화센터에서 결혼을 했다. 결혼 소식은 사모님과 간간이 내왕이 있는 영희가 전해 주었다. 사모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폐가 될까 부담스러우나 제자 중 나에게만은 꼭 알리라고 하셨다 한다.
나는 당연히 축하할 일이라 참석했다. 선생님께서 후학과 제자들에게 베푸신 음덕을 생각하면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모님의 뜻을 헤아려 다른 사람에게는 결혼 소식을 따로 전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 사모님과 가끔 소식이 닿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다.
그동안 사모님과는 대화나 전화 통화를 한 적이 거의 없어 선생님을 곁에서 오래 있었음에도 사모님을 대하는 것을 무척 어렵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가 사는 곳의 정확한 주소를 모르셔서 직접 청첩장을 보내시지는 못하셨어도 인편으로 알려 주신 것이 감사했다.
결혼식 당일, 홍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동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 내가 예식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으나 영희 선생은 먼저 예식장에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장에서 사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장례식 직후에 여러 지인들과 함께 뵙고는 처음 뵙는 자리였다.
신부대기실에 가서 우리 양을 보고 축하의 말을 전했다. 우리 양이 5살 때부터 선생님 댁을 찾았어도 결혼식에서 우리 양에게 말을 건넨 것이 처음이다. 신부가 서른다섯 살, 신랑은 마흔 살 좀 늦은 결혼이지만 신랑이나 신부 모두 어려 보이고 잘 어울리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신랑은 용모가 단정하고 반듯한 청년으로 외국계 반도체회사의 마케팅 부서에 근무한다고 했다.
예식장으로 들어갔더니 선생님과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신 전기호 선생님과 박규서 선생님께서 함께 앉아 계셨다. 두 분 선생님께 인사를 올리고 우리는 합석을 했다. 선생님의 막역한 친구이신 전기호 선생님은 선생님 장례식 뒤에 내가 두어 번 모셨고 박기서 선생님은 따로 뵙지 못했었다.
결혼식의 주례는 국문과 최상진 선생님이 했다. 우리 양은 외삼촌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했다. 결혼식 도중 식장을 둘러보니 대학의 국문과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놀랐다. 선생님의 제자인 최상진 교수는 주례말씀을 하던 중에 돌아가신 선생님 말씀을 꺼내며 말을 잇지 못해 나도 눈물이 나왔다. 오늘 같은 가장 기쁜 날, 이 자리에 꼭 계셔야 할 선생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 슬퍼서 눈물이 나고 목이 메었다.
예식을 하는 내내 기쁜 만큼 선생님 생각이 간절했다. 주례 말씀을 들으며 엄숙한 분위기에서 결혼의 의미와 선생님의 은혜와 사제 간의 깊은 인연을 되새겼다. 식장 안은 축하하는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사회를 본 친구가 신랑 체력테스트를 한다고 해서 덕분에 흥이 더해지고 결혼의 추억을 불러 주는 듯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회를 맡은 친구의 용기로 신랑은 힘들었겠지만 결혼식의 분위기와 특색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예식이 끝난 뒤, 최상진 형에게 인사를 했다. 경희대 국제교류원의 조현룡 교수를 만났다. 신부의 하객은 대부분 우리 양이 재직하고 있는 경희대학교 국제교류원의 사람들이다. 신부 측 하객 중에 선생님 계실 때에 많은 사랑을 받고 따르던 국문과 교수들은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 선생님 생전에 가까이 찾던 제자 중, 대여섯 명은 꼭 참석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연락이 미처 안 되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우리 양의 동생인 주한이를 만났다. 우리 양과 주한이는 연년생이다. 주한이가 어려서는 우리들이 선생님 댁에 가도 대학생 누나와 형이라 거리가 멀어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 서른네 살의 의젓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많이 사랑하고 아끼신 아들이라 선생님과 사모님 모습을 많이 닮았기에 더욱 선생님 생각이 났다.
주한이와 얘기를 나눈 뒤에 식당으로 갔다. 뷔페인데 두 분 선생님은 벌써 소주 두 병을 비우고 계셨다. 소주 두 병을 더 달라고 해서 선생님들과 합석을 했는데 두 분 선생님은 소주를 맥주잔으로 마시면서 내게도 큰 잔으로 권하셨다.
경희대 삼총사가 이젠 두총사로 바뀌셨으니 예전처럼 자주 술자리를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두 분 선생님도 사모님과는 자별한 사이가 아니셔서 가볍게 인사만 나누시고는 우리와 계속 자리를 하셨다.
선생님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돌아가신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이 났다. 선생님께서 늦은 결혼으로 두 자녀를 늦게 얻으셨다. 거기다가 일찍 돌아가셔서 자식이 결혼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시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 말씀하셨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났다. 좋은 자리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겠지만 선생님을 아는 제자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사이 안영훈 교수가 와서 인사를 하고 갔다. 상진이 형이 두 어른께 잔을 올렸다. 상진이 형도 국문과 교수들이 하나도 안 온 것에 대해 무척 서운하게 여기셨다. 우리 양의 결혼 소식을 국문과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식장 안에 종회 형과 중섭 교수가 보낸 화환은 있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 인심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물론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을 것이다. 오지 않은 사람을 무조건 탓할 일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무척 섭섭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꾸 술잔에 손이 갔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넘치지만 정승이 죽으면 오는 사람이 없다’는 옛 속담이 생각났다. 하기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여러 해가 지났으니 이젠 사람들 기억에서 선생님도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잔을 자꾸 비워 술이 거나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어른들께서는 먼저 가시고 나는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영희 선생하고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며 오늘 결혼식을 반추했다.
선생님이 귀한 따님의 결혼식에 계시지 못한 상황이 아프게 새삼 다가왔다. 사모님께서 따님의 결혼을 준비하시는 동안 참 많이 애쓰시고 속이 상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기쁘셨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의 참 여전한 모습을 보면 세월이 간 것인지 그냥 멈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술을 더 마셔도 안 취할 것 같더니 이미 많이 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어떤 소설의 한 부분이 생각이 났다.
오상원의 『유예』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놈들은 멋쩍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대로 돌아들 간다. 발의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 가며 방안으로 들어들 갈 테지. 몇 분 후면 그들은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우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그래,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거였다. 그게 끝난 게 아니라고 자꾸 붙잡으려는 내가 잘못된 것이다. 영희 선생은 내게 ‘깊이의 옹졸함’이 있다는 말을 했다. 끝난 것을 끝난 것으로 받아드리지 못하는 내가 ‘옹졸’하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본능일 것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다. 그게 세상의 이치라면 과거에 얽매여 사람들의 잘, 잘못을 따지는 것은 허망한 일인 게 맞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집착하는 내가 ‘옹졸하다’는 지적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나무, 서정범 선생님 (0) | 2012.03.26 |
---|---|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0) | 2012.03.26 |
유리창(琉璃窓)Ⅰ, 은덕이 영면하다 (0) | 2012.03.26 |
역(驛), 글쟁이 시만이 (0) | 2012.03.26 |
저문 날의 생각, 박지연 선생님 (0) | 2012.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