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6. 18:47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꽃나무, 서정범 선생님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히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
-이상, 「꽃나무」에서
선생님에 대한 위키백과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서정범(徐廷範, 1926년 9월 23일 ~ 2009년 7월 14일)은 대한민국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시인·국문학자·수필가·민속학자·무속연구가·사회학자·철학자였다. 본관은 이천 서씨
1958년 자유문학으로 문단에 등단, '병상기(病床記)'와 '미리내' 등 많은 수필을 발표했고, 모교인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006년 성추문 루머에 휘말려 대학교수직을 사퇴했다. 이후 무속인의 무고임이 밝혀졌으나 교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1926년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교인 경희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1958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고, ‘병상기’ ‘미리내’ 등 여러 수필을 발표하였다. 1963년 5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임용, 이후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장과 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어원학회 초대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한국어와 한글의 어원을 연구하다 만주어, 몽골어 등 동북아시아 언어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한글과 한국어의 기원을 연구하며 그는 무속, 토테미즘, 샤머니즘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여, 1950년대부터 3~4천여 명의 무속인, 박수 등을 만나 면담하였다.
1971년 4월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1985년부터 대학가의 유행어 등을 모아 ‘별곡 시리즈’를 펴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것이 책으로 엮이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는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해마다 관심사가 무엇인가, 대표적인 사건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참새 시리즈’ 등을 수집하기도 했다.
1980년 이후 한국수필 주간, 수필춘추 고문 등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 교수로 초빙되었다.
1981년 한국문학상, 1993년 펜클럽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수필문학상, 2004년 제 8회 동숭학술상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1996년 12월 한국어원학회 초대회장, 1990년 3월 경희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고 1998년에는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귀신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귀신은 잠재된 공포감의 표출일 뿐이라는 것이다. 2002년에는 저서 ‘한국무속인열전’을 펴냈다.
내가 서정범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9년 3월 중순이다. 경희대 문리과대학에 79학번으로 입학을 한 뒤에 1주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첫 수업이 ‘교양국어’였는데 이 수업시간에 서정범 선생님이 들어오셨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 ‘교양국어’는 ‘A’반과 ‘B’반 둘로 나뉘어서 강의를 받았는데 ‘A’반은 조병화 선생님이, ‘B’반은 서정범 선생님이 강의하셨던 것 같다. 두 시간 연강으로 되어 있었는데 선생님은 외모가 ‘멋진 대학교수’가 아니셨다. 당시 조병화 선생님은 베레모를 비스듬히 쓰시고 파이프를 입에 물도 다니시는 멋진 모습으로 얘기가 돼서 나는 그 분을 못 뵈었어도 멋진 모습으로 생각했지만 내 눈 앞에 보이시는 서정범 선생님은 왜소한 외모에 안경을 쓰시고 목소리도 크지 않아서 뒤에 앉은 내게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솔직히 ‘대학교수’라고 하면 고등학교의 교사와는 많이 다른 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많다는 것 외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첫 강의에 실망하고 두 시간 뒤에 군 입대를 위한 휴학원을 냈고 그걸로 1979년 강의는 끝이 났다.
1982년, 내가 군에서 33개월 14일을 복무하고 1월 14일에 전역한 뒤에 경희대에 복학원을 내러 갔더니 이젠 ‘문리과대’가 아니고 학과별로 분리가 된 상태에서 입학생을 뽑아 나도 국문, 영문, 사학, 국민윤리 등 네 학과 중에서 한 학과를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국문과였다.
나는 학점을 전혀 이수하지 않은 채 군에 갔기 때문에 모든 과목을 다 이수해야 했는데 ‘교양국어’ 담당교수는 고경식 선생님이셨다. 1학년은 주로 교양과목이라 서정범 선생님은 뵙지 못했다. 2학년이 되면서 국어과 전공과목은 주로 서정범 선생님이 맡고 계셔서 나는 2학년 때부터 서정범 선생님에게 여러 과목을 배우게 되었다.
1학년 때는 직접 강의가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뵐 기회가 없었지만 당시 국문학과에는 서정범 선생님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떠돌고 있었다. 가장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는 서정범 선생님이 조병화 선생님과 알력이 생겨 조병화 선생님이 인하대로 가시게 되었다는 거였다. 이 얘기의 출처가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고학년 선배들과 가깝게 지내는 작가 지망생들이 전한 것이다. 당시 말로는 ‘어용교수’라고 했다.
‘어용’이라는 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나 그 밖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자주성 없이 행동함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서정범 선생님이 권력기관에 영합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다만 선생님께선 경희대학교 내에서는 탄탄한 입지를 가진 분으로 소문이 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큰 보직을 받은 적도 없고 학교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중기에게 들은 얘긴데 서정범 선생님이 중기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반정부시위에 열중한다고 중기 형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신군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고 시위에 나서는 것을 절대 좋아할 리가 없으셨을 것 같다. 그런저런 이유로 당시 소위 운동권 학생들은 선생님께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강의에 안 들어왔다고 아주 낮은 학점을 받았기 때문에 그쪽에선 누구도 선생님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놓고 비방하고 다녔었다.
나는 서정범 선생님께 인정을 받는 학생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2학년 때에 학년 학과대표를 하면서 강의 시간 등에 대해 학생들 의견을 선생님께 대신 전달하기도 했는데 2학기 추석을 앞두고 징검다리 휴일이 된 적이 있었다. 전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복학생들과 지방 출신 학생들이 나더러 각 과목 선생님을 찾아뵙고 징검다리 휴일을 연휴로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서 본의 아니게 총대를 멘 적이 있었다.
내가 복학생이고 강의시간에 열심히 듣는 편이라 선생님들께서 까다롭지 않게 편의를 봐주셔서 나름 의기양양했는데 여학생 하나가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그게 순전히 내 개인 의견이라고 얘기해서 나만 난처해진 적이 있었다. 서정범 선생님께서 나를 부른다고 해서 찾아뵈었다가 된통 꾸중을 듣고 나왔고 그 뒤로는 선생님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고 발을 뺐다. 그때에 내가 서정범 선생님께 제대로 찍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2학년 때부터 고경식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셨고 항상 선생님이 계시는 곳은 내가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우리 선생님 휘하가 되어갔고 서 선생님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서정범 선생님께 너무 깍듯이 대하시는 우리 선생님을 보고 투덜거릴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서정범 선생님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대학시절에 선배들을 따라서 세배를 다니던 것도 두 번인가 가고는 다니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께 서정범 선생님은 은사나 다름없는 분이셨다. 두 분은 12년의 연차가 있으신데 서정범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 대학시절에 학과 조교이셨고 우리 선생님이 경희대교수로 올 적에 큰 힘을 써주셨다고 들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선생님이 서정범 선생님을 대하시는 자세는 내가 볼 적에도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려서 좀 민망할 정도였다.
우리 선생님은 서정범 선생님께 꼭 ‘선생님’으로 호칭을 하셨고 담배를 피우시다가도 선생님을 뵈면 바로 끌 정도였다. 게다가 전화를 받거나 하실 때도 ‘저 경식입니다’라고 하셔서 내가 그런 모습을 보고 건방진 소리를 하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러시는 것이 솔직히 싫었지만 선생님을 보면서 윗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많이 배웠다.
당시에 경희대국문과에는 명예교수이신 박노춘, 황순원 선생님이 윗분으로 계셨고 그 다음이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최동호 선생님 순이었으니 서정범 선생님이 국문과의 좌장이셨다. 다만 위의 두 분은 이미 퇴임을 하신 상태였지만 선생님의 직접 은사이셨던 터라 항상 상전으로 모시는 모습이었다.
서정범 선생님은 어떤 면에서는 기인(奇人)이셨다. 집안 내력이 단명(短命)이라고 음식 섭취에 엄청 신경을 쓰시면서도 맛이 좋은 음식을 찾아서 천리 길도 멀다 않으셨다. 양양에 있는 단양막국수집의 막국수를 좋아하시어 서울에서 다섯 시간의 버스를 타고 가셔서 국수 한 그릇 드시고 다시 다섯 시간의 버스를 타고 오시는 이야기, 소화가 잘 된다고 보신탕을 무척 좋아하셨던 이야기, 자신이 많이 드시지 못하니까 남들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 하셨던 이야기…….
선생님은 낚시를 무척 좋아하셨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다니셨다는 말씀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우리 선생님이 몇 번 따라가셨다고 들었다. 우리 선생님은 낚시대를 잡고 앉아 계실 분이 아니니 그 자리가 정말 지루하고 힘드셨을 것이다. 서정범 선생님은 민물낚시만 하셨고 외낚을 즐기신 것으로 알려졌다. 고기를 잡고자하는 어부가 아니신 거였다. 어쩌다 낚시터에 가보면 한 사람이 낚시대 여러 개를 걸어놓고 낚시대마다 바늘을 주렁주렁 달아서 고기 낚는 것을 보는데 내 생각에도 낚시를 한다면 외낚이어야 진짜 낚시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에 대해서는 칼로 그은 것처럼 확실하게 하셨는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송곳하나 대지 못하게 확고하셨다. 그런 면이 학자의 태도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적도 많이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예의가 바르지 못한 학생은 아주 싫어하셔서 국문과에서 대학원에 진학을 하려면 서정범 선생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파다했었다.
자신을 잘 따르는 학생은 엄청 편애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으니 당연히 국문과 학생은 선생님께 편을 가르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뒤편에 있는 학생이었다.
경희대학교 교수회관에 터줏대감으로 계시면서 다른 교수님들 방 배정까지 다 정하실 정도로 꼬장꼬장하셨고, 눈 밖에 난 교수들은 방 배정도 뒤로 밀렸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경희대교수가 된 제자가 교수협의회 회장직에 출마했을 때에 모든 교수들에게 전화를 해서 ‘스승을 모실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반대를 종용하셨다는 얘기도 지금까지 전해 온다.
나는 대학 시절에 서정범 선생님과 그리 좋은 인연을 맺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학점을 짜게 주신 것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많았다. 게다가 우리 선생님이 서정범 선생님 때문에 경희대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는 잘못된 판단에 서정범 선생님을 비방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던 터라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뵙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선생님에 대해 좋게 말한 적도 없었고 뵐 일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서정범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알타이조어연구’에 가장 깊이 가셨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뿌리가 알타이어에서 왔다고 연구하신 분들이 많겠지만 선생님은 알타이조어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신 분이다. 나는 선생님이 젊으셨을 때에 지금처럼 세계여행이 자유롭고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어 중앙아시아를 가실 수 있었다면 알타이연구에 엄청 큰 업적을 남기셨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당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연구를 하시느라 무척 애를 쓰셨지만 그 성과가 연구만큼은 안 나온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솔직히 서정범 선생님과 가까이 지낸 제자가 아니다. 당시 국문과 선생님 중에서 내게 A+학점을 주지 않으신 분이 서정범 선생님과 김태곤 선생님이다. 다른 분들께는 다 100점을 받아봤지만 두 분은 85점 이상을 주신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잘하지 못해서 그런 것임은 분명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섭섭했었다. 나는 어떤 과목이든 열심히 하는 편이었고 내가 시험지에 쓴 내용이 점수가 좋은 친구들보다 절대 못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저런 일로 내가 두 분 선생님께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고 그 반대급부로 우리 선생님께 더 밀착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뵐 수가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제자로서 더 따뜻하게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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