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서정범 선생님 영면

2012. 3. 26. 18:50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낙타, 서정범 선생님 영면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신경림. 낙타에서

 

 20076월에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경희대국문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지냈다. 아니 19918월에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뒤부터는 회기동으로 갈 일도 없었고 국문과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는 내가 크게 성공하여 국문과에 뭔가 기여할 것처럼 지냈지만 졸업하고 나니 갈 일이 많지 않았다. 대개 모교 행사라는 것들이 을 낼 때만 부르고 뭔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고 좋은 일은 자기들끼리 다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내가 학교를 떠난 뒤에 거기 가서 들러리나 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는 마지못해 몇 번 행사에 갔지만 그 뒤로는 가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을 뵐 때에도 학교로 가지 않고 시내 중심에서 뵙게 되니 정말 갈 일이 없었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에 이틀 동안 가 있었지만 그때도 거기가 많이 생소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2009415일에 경희대 앞에서 지형이, 희섭이와 만나기로 해서 거길 간 것이다. 처음 약속은 희섭이와 했던 것 같은데 한림회에서 서로 알고 지낸 84학번 지형이와 미교과 82학번인 준연이도 불러서 넷이 만났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한동안 울적하게 지내다가 예전 추억이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보니 그런 자리가 된 거였다. 그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지나는 말로 지형이에게 서정범 선생님에 대해 물었더니 깜짝 놀랄 얘기를 하는 거였다.

 

 선생님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분당 서울대 병원에 홀로 입원해 계신다는 거였다. 자녀가 둘인가인데 다 생활이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지형이와 박재양 선배가 자주 병원에 들러서 수발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 내 성격이 괴팍해서 제자들도 다 떠나고 찾는 제자가 없다고 자탄하신다고 해 내가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러면서 여러 추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2학년이 되면서 서정범 선생님과 매 학기 만나게 되었는데 사실 나는 국어학 강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강의 내용은 대부분 알타이어족의 조어(祖語)에 관한 것인데 그게 과목의 내용과 일치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 학부 학생에게 알타이조어 강의가 왜 필요한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강의가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전공과목이라 수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솔직히 울며 겨자 먹기였다.

 거기다가 선생님은 학생에 대한 호불호가 무척 강하셔서 한 번 좋지 않게 보인 학생은 학점이 안 좋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얘기였다. 선생님은 세련되고 예의 바른 학생을 좋아하셨는데 나는 투박하고 촌놈그대로의 모습이라 외모와 목소리도 마음에 안 드셨을 것인데 글씨 또한 엉망이라 학점을 잘 받을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2학년 시절엔 당시 국문과 조교였던 이화형 선생 덕분에 점수를 잘 받았다. 맨 처음에 본 과목은 70점 정도였는데 내가 이화형 선생에게 엄청 졸라서 두 번이나 교수회관을 다녀와 82점까지 받았다. 그게 최고점이었고 화형 선생이 조교에서 물러난 뒤에는 80점을 넘겨 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학점이 잘 안 나왔고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던 여학생은 나보다 훨씬 높은 학점을 받으니 나도 선생님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화형 선생이 조교를 하고 있으면서 국문과의 여러 행사에 나를 꼭 불러 일을 시켜서 일이 끝난 뒤에 교수님들 식사 자리 끝에 앉아 여러 차례 식사를 하면서 좀 더 가깝게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점이 더 잘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서정범 선생님댁에 세배를 간 적이 두 번 있었다. 대학 3학년 때와 4학년 때의 11일인데 사실 내가 국문과 세배 팀에 낀 것은 좀 생뚱맞은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과 조교들과 대학원생들이 모여서 박노춘, 황순원, 서정범, 김태곤, 고경식, 최동호 선생님 댁에 세배를 다녔는데 학부학생인 내가 거기 끼인 것은 순전히 화형 선생이 배려해준 덕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3학년 때 국문과학회장이라는 감투도 쓰고 있어 따라다녔던 거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박노춘 선생님과 우리 선생님 댁 두 군데만 혼자서 다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정범 선생님하고는 거리가 멀어졌고 뵐 기회도 없었다. 내가 교육대학원에 다닐 때는 다행스럽게도 야간 강의만 있어서 연세가 많으신 서정범 선생님의 강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갔고 내가 가깝게 모시는 분이 아니었던 서정범 선생님이 노년에 외롭게 지내시고 병원에 홀로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는 갑자기 마음이 서글퍼진 거였다. 그래서 지형이에게 선생님께 내가 찾아뵈어도 괜찮으신지 여쭈어 달라고 얘기를 했더니 지형이가 정색을 하고 형님이 선생님을 찾아뵌다고 하면 무척 반가워하실 거다해서 말씀을 여쭙고 연락을 달라고 했다.

 지형이가 며칠 뒤에 전화를 했는데 선생님이 내 얘기를 듣고 무척 반가워하셨다고 하면서 날을 잡아서 같이 뵙자고 했다. 5월은 내게 일이 많은 달이라 시간이 차일피일 지나다가 더 시간이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지형이와 통화해 531일 일요일로 날을 잡았다.

 지형이가 차를 가지고 나를 태우러 오겠다고 했지만 내가 분당 병원으로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밖에서 보셨으면 한다고 말씀을 주셨다고 해 분당 율동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생님께서 요즘은 보신탕보다는 오리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율동공원 옛골토성으로 자리를 마련하고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렸다. 점심시간이었지만 식당은 한적해서 좋았다. 내가 먼저 가서 30분 정도 기다렸고 지형이가 병원에 가서 선생님을 모시고 왔다.

 

 밖에서 지형이가 안내하는 목소리가 들려 바로 나갔더니 원래에도 수척하셨던 분이 더 여윈 몸으로 지형이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셨다. 내가 뛰어가서 선생님 손을 잡으면서, “선생님 저 영주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까 영주야 목소리가 여전하구나. 나는 이제 눈도 어두워져서 희미하게 보이는데 영주 목소리를 들으니 예전하고 똑 같아 반갑구나라고 하셨다.

나는 목이 메어 더 말이 안 나오고 눈물이 났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고 그 사이 선생님은 이렇게 늙으셨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선생님을 모시고 지난 얘기 나누면서 많은 추억이 나왔다. 돌아가신 우리 선생님 말씀도 하셨고 또 제자들 말씀도 하셨다. 내가 조촐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 선생님께는 큰 즐거움을 드린 것 같아 나도 마음이 흐뭇했다.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에 박재양 선배가 왔다. 내가 대학 2학년 때부터 대학원에 다니던 재양이 형님과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졸업하고 학교를 떠난 뒤에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지냈었다.

 

 재양이 형님은 석사과정부터 박사과정까지 서정범 선생님이 지도교수이셨고 그 관계를 떠나서도 선생님을 가장 잘 모신 정말 수제자였다. 재양이 형님과 지형이만 지금 외로운 선생님 곁에 계신 거였다. 형님은 지인들과 등산을 갔다가 내가 선생님을 뵙는다는 말을 지형이에게 듣고서 일정을 당겨 분당으로 왔다고 했다.

 형님은 선생님께 선생님전집출간 준비 과정을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내게 우리 재양이하고 지형이가 내 수제자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힘드셔도 좋은 제자가 두 명이나 있으니 그것도 큰 다행이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선생님께서는 짧은 시간이지만 즐겁게 시간을 보내시고 지형이가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선생님이 가실 때에 내가 선생님 이제 자주 뵙겠습니다. 꼭 다시 뵙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영주야 고맙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집에 오는 버스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서정범 선생님을 진즉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 제자로서 선생님께 불경했던 후회, 그리고 우리 선생님과 서정범 선생님의 관계 등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2009714일 밤에 지형이가 전화를 했는데 서정범 선생님께서 영면하셨다고 부음을 전했다. 참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찾아뵙지 못했고 선생님을 뵌 지가 두 달도 안 되었는데 돌아가셨다니…….

2009715일 수요일, 이날은 학교에 일이 많았다. 강서지구 학교설명회가 강서구민회관에서 있어 연구부 선생님들과 우리 학생 몇 명이 함께 가서 브로셔를 돌리고 내가 발표를 했다. 그게 끝난 뒤에는 참석자들과 학교 앞에 와서 삼계탕으로 저녁을 먹어야 했다. 내가 연구부장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다 마쳐야 해서 아홉 시가 다 되어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재양이 형님과 지형이가 상주처럼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선생님 자녀가 둘인가로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에게는 두 제자가 훨씬 큰 상주로 보였다. 예전에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조문객이 많았고 시끌벅적하며 국문과 졸업생들은 다 온 것 같았는데 여기는 너무 썰렁해서 참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재양이 형님과 지형이, 그리고 그 시간에 조문을 온 국문과 82학번 시만이가 전부였다.

 경희대 국문과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아서 내가 지형이에게 혹 국문과에 부음을 전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분명히 전했다고 했다. 세상인심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부음을 전하지는 않았다. 나도 선생님께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학생인데 누가 조문을 올까 싶은 생각이 솔직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만이와 소주 몇 잔을 마시고 선생님 영정사진에 하직 인사를 하고 홍제동으로 왔다. 택시에서 내려 맥주 한 병씩을 마시고 집으로 왔다.

 경희대 국문과의 영원한 스승 한 분이 이렇게 또 쓸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선생님께서 시류에 맞으신 분은 아니셨지만 그래도 학자로서 자신의 길을 뚜렷하게 가셨고 국문과의 스승으로 많은 제자를 키우셨는데 마지막 길이 너무 쓸쓸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