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찔레꽃 고운 당신』

2012. 3. 26. 18:56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찔레꽃, 찔레꽃 고운 당신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잊을 사람아

 

-김영일. 찔레꽃에서

 

 『찔레꽃 고운 당신故 高敬植 교수 추모글 모음으로 錦峰 高敬植 교수 추모문집간행위원회 엮음으로 나온 책이다. 국학자료원에서 출간했는데 200961일에 인쇄하고 같은 달 10일에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목을 찔레꽃 고운 당신이라고 한 것은 우리 선생님께서 주석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면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찔레꽃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나도 이 책에 선생님 전 상서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 편 실었다. 이 책을 내가 받은 것은 2009614일 일요일에 선생님 묘소에 가서다. 선생님 기일이 양력으로 15일인데 월요일이라 하루 당겨 묘소에서 참배하기로 연락이 되어서 나도 이날에 갔다.

 이날 묘소에 온 사람들은 상진이 형, 종회 형, 중섭 선배, 정재 형, 서하진, 이봉일, 안영훈 등 국문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로 다 선생님 제자였다. 동문 제자가 아닌 분으로는 김진영 교수님, 김용식 선배님, 홍희 선배님, 유경환 교수님이 오셨고 가족으로 사모님과 고우리, 고주한이가 왔다.

 나는 세근이가 운전하는 차에 내가 만든 추모집인 마지막 휴머니스트백 권을 싣고 가서 거기 온 분들에게 한 권씩 드리고 남은 책은 사모님 차에다 옮겨 실었다. 추모식이 끝난 뒤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는 것을 굳이 뿌리치고 세근이, 영희와 셋이 분당 율동공원 앞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왔다. 괜히 공치사 받는 것도 부담이고 또 선생님 얘기가 많이 나오면 눈물이 날까 봐 미리 피한 것이다.

집에 와서 찔레꽃 고운 당신을 살펴보았다.

 책은 봉정의 글로 시작해서 . 錦峰 文集, . , . 에세이, 그리고 年譜 硏究業績으로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금봉 문집>은 선생님께서 잡지 등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것으로 失笑, 문학을 통해 본 풍자와 해학, 漢字 早期敎育에 대하여, 행복을 가져온 아내, 살 수 없는 마음, 죽음을 극복한 사랑, 불타는 오막살이, 요물의 한, 나무 열매의 선물, 참된 우정, 신비한 성11편인데 선생님께서 새농민이라는 잡지에 19914월부터 12월까지 세계의 민화를 소개하면서 실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는 전 서울여대교수이며 시인인 김준 선생님의 선생님 회갑 축하시 東海壽를 누리시게(고경식박사 화갑을 축하하며), 전 광주대교수이며 시인인 조태일 선생님의 그립습니다(고경식 교수님의 회갑을 축하드리며), 경희대 교수이며 시인인 박주택의 저 푸른 산봉우리처럼, 경희대 교수이며 시인인 이선이의 눈 서린 꽃빛을 뿜으셨지요(고경식 선생님께)등 네 편으로 다 선생님의 회갑기념을 축하한 시였다.

 <에세이>는 경희대학교 제1011대 총장이며 현재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인 조정원 님의 만나고 싶은 사람 중 1(걸어 다니는 字典), 경희대 명예교수이시며 선생님의 절친한 친구이신 전기호 선생님의 錦峰 高敬植 교수와 나, 수필가이시며 친구인 정득복 님의 高凰山 위로 꽃바람을 일으키고 하늘로 날아간 붕새(錦峰 高敬植 벗을 기리며), 강원대 명예교수이시며 소설가인 전상국 선생님의 선배님이 떠나신 빈자리에, 인하대 명예교수이시며 소설가인 김용성 선생님의금봉 선생의 작취미성(昨醉未醒), 경희대 교수이신 김진영 선생님의 그리운 錦峰 선생님께, 경희대 교수이시며 만해학술원장이신 김재홍 선생님의 인정미와 친화력을 위하여(금봉 고경식 교수를 추모하며), 공주영상대 교수이신 김용식 선생님의 차 맑게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청량하게 살자고!, 경희대학교 문과대학장인 최상진 선생님의 인생은 토요일 오후처럼, 경희대 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김종회의 찔레꽃붉게 피던 시절, 아동문학평론가인 김용희의 아동문학평론하면 먼저 생각나는 분, 경희대 교수이며 국제교육원장인 김중섭의 그리운 금봉 선생님께, 단국대 교수이며 소설가인 박덕규의 에프여! 디여!, 소설가인 김형경의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존재(고경식 선생님을 추모하며), 경희대 교수이며 시인인 박주택의 이제 스승을 여읜 자리에 아무 것도 두지 않으리라, 경희사이버대 교수이며 시인인 이문재의 기억력, 놀라우신 기억력, 경희대교수인 이정재의 선생님과의 긴 여정을 기리며, 경희대교수이며 소설가인 서하진의 친구 같은, 아저씨 같은……」 , 시인인 이경의 가을 깊은 밤에 쓰는 편지(고 고경식교수님을 생각하며), 중앙대국악대학원 교수인 홍태한의 금봉 선생님과의 추억. 경희사이버대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이봉일의 묘처부전(妙處不傳), 영일고교사인 이영주의 선생님 전 상서, 경희대교수인 안영훈의 선생님께, 경희대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김수이의 선생님의 춘향전, 서울여대교수인 차충환의 금봉 고경식 선생님을 회고하며, 경희사이버대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홍용희의 고향 어른 같은 선생님, 경희대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고인환의 선생님과 함께 한 첫 해외여행, 경희대교수인 김동건의 선생님의 낭랑한 음성, 경희대교수인 김진해의 , 이유 없는, 문학평론가인 이성천의 옛사람을 생각하며 탄식하니, 문득 밝은 달 황금 술잔을 비춘다.”, 경희대교수이며 동화작가인 진은진의 기쁜 우리 젊은 날, 문학평론가 강정구의 참스승의 한 길, 경희사이버대교수인 방성원의 오감(五感)으로 추억하기, 중국대외경제무역대학교수인 배규범의 그리운 선생님께, 인디애나주립대학 객원교수인 이성희의 아직은 낯선 말들로 선생님을 추억하다, 경희대민속문학연구소 연구원인 김태우의 仙界, 어디에 머물고 계신가요?, 경희대객원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오태호의 독보적 주당의 빈 자리, 경희대교수인 이정희의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경희 사랑, 소설가 노희준의 보내지 못한 편지(금봉 고경식 선생님을 추모하며)가 실려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한 번 읽고는 책꽂이에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읽지 않다가 이번에 내가 만든 마지막 휴머니스트의 제 3영원한 얼치기를 완전히 바꿀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읽어보았다.

 예전엔 그냥 깊이 생각지 않고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던 여러 얘기를 새록새록 떠오르게 해주는 좋은 글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선생님이 내게만 잘 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국문과의 모든 학생들에게 다 관심을 주셨고 사랑했음이 구구절절이 눈에 보였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랜 시간 우리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술을 드신 분이 전기호 선생님이신 줄 알았었다. 그런데 한참 전에 전기호 선생님을 뵌 자리에서 여쭈었더니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날에 선생님과 같이 술을 드신 분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전기호 선생님의 글 가장 후회가 남는 날에 나온 제자가 바로 나였다. 그날은 스승의 날 행사가 아니었고 내가 곧 있을 우연 혹은 인연출판기념회에서 선생님께 축하말씀을 부탁드리면서 사조참치에서 선생님과 둘이 거나하게 마셨는데, 선생님께서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회라는 무척 긴 간판의 사무실에 전기호 선생님이 계시다고 가자고 하셔서 그리로 간 거였다.

 전기호 선생님이 거기 위원장이신데 장관급 대우라고 하시면서 그 넓은 사무실을 보고 못마땅한 얼굴을 지으시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기호 위원장님께서 바쁘셔서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나와 시청역에서 차를 타고 가시는 선생님을 배웅했었다.

 「그립습니다(고경식 교수님의 회갑을 축하드리며)시를 올렸던 조태일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보다 한참 먼저인 199997일에 영면하셨다. 나는 조태일 선생님 빈소가 일원동 삼성병원에 차려졌다는 기사를 보고서 혼자 병원으로 갔다.

거기 빈소에 가서 조문을 하고 접객실에 갔더니 우리 국문과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고 우리 선생님도 계셔서 놀랐다. 평소에 친분관계가 있으니까 잠깐 조문을 하고 가실 수 있는 일이지만 선생님께서는 거기에 오래 계시면서 거기 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계신 거였다. 나는 병원에서 집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핑계로 오래 앉아 있지 않고 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바로 나왔다. 선생님은 내게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으셔서 신문기사를 보고 알았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선생님은 내가 거기에 조문을 온 것을 무척 달갑게 생각하시는 모습이셨다.

 사실 조태일 선생님과의 만남은 우리 선생님으로 인해 시작된 거였다. 내가 대학 4학년 때 여름방학 중에 삼의원에 기거하면서 거기서 멀지 않은 국문과 학회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 어느 날 선생님이 학회실에 들르셨다가 나를 보시고는 같이 마포에 가자고 하셔서 그때 처음 따라갔던 것이 조태일 선생님과의 인연이었다. 그날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노량진에 사는 은경이를 불러내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그 뒤로는 내가 술이 고플 때면 조태일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고 통화가 되면 으레 마포 시인사로 오라고 하셔서 거기 가서 술을 가득 마시곤 했었다. 내가 영일고에서 교직을 시작했고 첫 월급을 받았을 적에 양말을 사 가지고 조태일 선생님께 인사를 갔었다. 그날도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열두시가 넘도록 술을 사주셨고 나중에는 택시까지 태워 보내주셨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조태일 선생님께서 광주대학교로 가신 뒤에는 거의 뵙지 못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해서 조문을 갔던 거였다. 조태일 선생님도 정말 그립다.

 나는 경희대국문과에서 박노춘 선생님, 황순원 선생님, 서정범 선생님, 김태곤 선생님, 박이도 선생님, 우리 선생님과 최동호 선생님을 뵈었다. 다 내게는 분에 넘치는 은사님이셨고 또 과분한 사랑을 받았는데도 생전에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 부끄럽다. 많은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최동호 선생님은 고려대학교로 가신 뒤에 뵐 기회가 별로 없었다. 평소에 술을 드시지 않았던 박이도 선생님은 건강하시겠지만 술을 드시지 않으니 뵙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참 빨리 가고 많이 갔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 612일에 선생님 묘소에서 흥술이, 순희, 영희, 호태, 종수와 만나 참배를 하고서 내가 다시 이 뒷부분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으로 내지 못하더라도 몇 가지 일은 정리해서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