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천(歸天). 기윤이 하늘로 가다

2012. 3. 26. 18:23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귀천(歸天). 기윤이 영면하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천상병, 귀천(歸天)에서,

 

 83학번 기윤이는 2015914일에 세상을 버렸다.

 

 98일 화요일에 화곡고등학교 홍규 선생이 문자를 보내 기윤이가 암이 뇌로 전이되어 위독하다고 토요일에 강남세브란스 병원에 문병을 가자고 했었다. 그 토요일은 내가 고향으로 벌초하러 가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나는 그날 갈 수가 없었지만, 이 사실을 기윤이와 가깝게 지내던 포천여자중학교의 호태에게 전했다. 그리고 김포 공항에 있는 중기에게도 전화로 알렸다. 두 사람이 다 일이 있어 그날 갈 수가 없다고 해서 그럼 우리끼리 날을 다시 잡아서 가자고 했다.

 

 11일 목요일에 중기에게 전화해서 다음 주 수요일인 916일에 기윤이 문병을 가자고 통화를 하고, 홍규 선생에게는 토요일에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가니 가거든 다음 주 수요일에 내가 중기하고 같이 간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랬는데 수요일이 오기 전인 월요일에 기윤이가 세상을 떠난 거였다. 가서 얼굴을 본다고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기윤이에게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던 거라서 두고두고 죄스런 마음이 될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기윤이와는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었다. 기윤이의 고등학교 동창이고 국문과에 같이 온 호태는 나를 잘 따르고 붙임성이 있었는데 기윤이는 말이 없고 무슨 일이든 먼저 나서지를 않아서 무척 소극적인 성격으로 보였었다. 그러다 보니 나하고 가깝게 지낼 일이 없었던 거였다.

 호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게 기윤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사람이 매우 착하고 순해서 손해만 보고 산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나야 그런 관계를 잘 알지 못해도 호태에게 자주 얘기를 들어서 기윤이가 무척 착하고 남에게 싫은 말을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호태는 어디 가서 절대 손해를 볼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호태 말대로 기윤이는 늘 남 좋은 일만 해 주고 자신은 손해를 봐도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다.

 기윤이가 국문과 동기인 친구와 둘이 자취를 했는데 그 친구가 연탄불을 갈 줄 모른다고 기윤이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연탄을 갈러 갈 때가 많다고 해서 나도 놀랐다. 호태는 이 문제로 무척 분개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그 친구를 불러서 얘기를 할 일도 아니라 나도 혀만 차고는 그냥 넘어간 적이 있었다. 내가 봐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윤이가 나하고 같이 국문과에서 지낸 시간이 2년 정도였지만 둘이 만나서 얘기한 적도 없었고 술을 마신 적도 없었다.

 

 내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영일고로 온 뒤에 몇 년 지나서 기윤이가 우리 학교 근처인 등촌중학교 국어 교사로 왔다. 등촌중학교는 우리 학교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서 거기 졸업하는 아이들이 우리 학교로 오는 곳이었다. 기윤이가 거기로 왔다고 내게 연락을 한 것이 아니라 호태가 연락을 했다. 나 같으면 먼저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인데 기윤이는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기윤이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시간을 내서 만나러 갈 일은 아니었고 기윤이도 나를 일부러 찾아 올 친구가 아니었다.

 나중에 기윤이가 결혼식을 할 때에 제천에 갔는데 거기서 83학번들을 많이 만났다. 기윤이 성격에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온 것이 의아하다는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아내가 국문과 83학번 동기였고 나이가 두 살이 많다고 하는데 무척 발이 넓게 지낸다고 했다.

 

 기윤이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강서양천지역의 우리 국문과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다. 내가 갔던 처음에는 그쪽 지역에 우리 국문과 출신이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우리 영일에도 3년 사이에 세 명이 되었고 덕원여고, 명덕고, 화곡고 등에 국문과 출신들이 있다고 하여 모임을 갖게 된 거였다. 70학번인 인길이 형님이 좌장이었고 대부분 70년대 후반 학번부터 80년대 중반 학번까지 여남은 명인데 나이 차가 크지 않다보니 서로 금방 알게 되었고 모임을 자주 가지면서 좋은 자리가 이어졌다.

 

 기윤이는 정말 말 없고 순한 사람이었다. 언제고 부르면 두말없이 달려와서 조용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꼭 나가서 피워 내가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는데도 변함없었다. 나는 모교 행사나 은사님의 일로 나가야 할 때는 늘 기윤이를 불러서 같이 다녔다. 그리고 중기가 김포 공항에 와서 일을 시작한 뒤에는 나는 중기하고 만날 때면 거의 기윤이를 불러냈다. 중기가 83학번과 같이 다녔어도 나이가 81학번과 같아서 기윤이는 언제나 중기를 선배로 깍듯하게 대했다.

 

 나와 중기는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고 거칠어지는 것이 순서인데 기윤이는 언제고 늘 똑같은 모습으로 말없이 웃으며 술잔만 기울였다. 나는 기윤이의 주량이 얼 만큼인지 알지 못한다. 술이 좀 들어가면 얼굴은 빨개지지만, 그 선한 눈매와 말 없는 웃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국문과 83학번 여자들이 다 좋은 기억으로 기윤이를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호태가 수원에 있을 때 그 동기들인 종수와 석영이와 함께 나도 불러서 기윤이와 함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모임의 친구들은 대학 다닐 때도 알고 지내던 사이라 오랜만에 만나도 늘 자주 만난 사이처럼 좋았다. 그 모임에 어떤 때는 중기가 와서 함께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만나다가 내가 우리 선생님 기일(忌日) 무렵에 혼자 성묘를 다닌다고 했더니 이 친구들이 함께 다니자고 하여 우리는 매년 선생님 기일 즈음해서 성남 공원묘지에 같이 다녔다. 기윤이도 처음엔 계속 같이 다녔다.

기윤이와 만나 가깝게 지내면서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기윤이가 폐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얘기가 들려 너무 놀랐다. 몇 달 안 본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긴 거였다. 그러니까 폐암인 줄을 늦게 안 거다. 기윤이가 수술을 받고 상태가 좋아져서 복직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한두 번 통화하면서 술을 마실 수 있을 때까지 견디자는 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던 사람을 앞에 놓고 혼자 마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들이 찻집에 가는 것도 그래서 만남을 뒤로 미뤘던 거였다.

 

 2015914일 월요일 3교시 수업이 끝나고 들어왔더니 기윤이가 별세했다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홍규 선생이 보낸 거였다. 내가 모레 수요일에 문병을 가기로 중기와 맞춰 놓고 이를 얘기해 달라고 했는데 이틀을 더 기다려 주지 않고 먼저 세상을 뜬 거였다. 강서양천지역 국문과 동문들에게는 모두 연락이 갔겠지만, 다른 곳은 경황이 없어 연락을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먼저 호태에게 전화로 알렸고 중기에게 알렸다.

 둘 다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는데, 여섯 시에 빈소가 있는 홍익병원에서 보자고 얘기했다. 토요일에 문병을 갔더라면 얼굴이라도 보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윤이를 떠올리니 너무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종일 마음이 가라앉아 무겁게 수업을 하고는 중기가 와서 둘이 홍익병원으로 갔다.

 

기윤이가 교회를 다녔는지는 알지 못하는데 그 아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닌 모양이었다. 제단을 기독교 방식으로 해서 향도 없고 잔도 없었다. 나와 중기는 그냥 헌화하고 나와 거기 주저앉아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조금 뒤에 기윤이와 가깝게 지낸 호태와 종수가 오고, 윤석영이가 왔고 김석영이도 오고 인길이 형님이 왔다. 시간이 흐른 뒤에 창헌이도 왔고 뒤에 홍규와 상우가 왔다. 거기서 아홉 시 반에 나와 버스를 탔는데 집에 오니 열한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가슴 아프고 슬픈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