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형이와 규범이

2012. 3. 26. 18:20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형이와 규범이

 

낙엽이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조병화, 낙엽끼리 모여 산다에서,

 

 84학번 지형이는 내게 가까운 국문과 후배 중에 끝번이다. 지형이와 단짝이었던 석만이가 있는데 이 친구는 필리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만 풍문으로 들었고 못 본지가 20년이 넘었다.

 지형이는 재수해서 국문과에 왔고 당시 78명 중 차석으로 들어왔다. 내가 3학년 때 국문과 학회장을 지냈는데 1학년 과대표였던 지형이를 종그락 부리듯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형이에게 많은 일을 시켰다. 그때 학회장인 나를 도와 일을 가장 많이 한 친구가 83학번 미경이와 84학번 지형이였다.

 

 문리과대학 중앙현관에 각 학과별 게시판이 있었는데 그 게시판에는 내가 지형이를 부르는 글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 있었다. 그 시절에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서로 연락을 취했고 거기 게시판을 본 사람들이 당사자에게 전해줘서 연결이 되곤 했었다.

 지형이는 내가 강요해서 제주도 답사를 같이 가게 되었다. 우리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25명인가가 1주일의 제주도 답사를 갔는데 거기서도 지형이가 일을 도맡아서 했다. 다른 1학년생도 있었지만 2/3가 넘게 여학생이 많았고 실제로 일을 도울 사람은 지형이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 앞에서 선생님이 갑자기 배가 고파서 못 움직인다고 엄포를 놓았을 때 내가 지형이를 시켜서 해장국을 택시로 배달해 온 얘기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 일을 시킨 나도 참 억지지만 그렇게 가서 해장국을 택시로 배달해 온 지형이도 억척이였다.

 

 답사를 다녀 온 뒤로는 지형이와 더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건 내 생각이고 지형이는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무슨 일을 시키든 두말없이 잘 해내서 내가 무척 신임하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학회비를 거둬서 학회장이 마음대로 썼는데 그 통장관리를 지형이가 했다. 어느 학년에서 얼마가 들어오고 무슨 일에 얼마를 쓰고 이런 기록을 다 지형이가 했던 거였다.

 

 국문과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소설, 극을 쓰겠다는 작가 지망생과 고전이나 어학을 하겠다는 학자지망생이다. 나는 처음부터 작가 지망생이 아니라 고전문학에 관심을 두었는데 지형이는 국어학에 관심을 둔 학생이었다.

 대학만 졸업하고 더 공부를 하지 않을 거라면 지도교수를 정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을지라도 평생 공부를 할 학생이라면 지도교수를 모시는 것이 자기 인생을 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79학번 친구 중에 자신의 지도교수가 다른 학교로 가시자 그 대학의 대학원으로 간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게 바람직한 일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사까지 간다면 지도교수를 모시는 일이 엄청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것인데 지형이는 서정범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신 거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교직에 나왔는데 지형이는 졸업하면서 대학원에 진학을 해 국문과 조교로 근무했다. 지형이와 석만이가 국문과 조교로 있을 때는 내가 얘기하면 열일 제쳐놓고 내가 부탁한 것을 먼저 해줄 정도여서 내가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그게 다 우리 선생님이 나를 믿고 아낀 후광에서 온 것이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들으면 내가 국문과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지형이는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으로 바로 직행을 했다. 예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석사과정을 졸업해도 박사과정은 쉽게 받아주지 않았는데 지형이가 워낙 성실하게 또 열심히 공부를 하니까 파격적으로 합격을 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박사과정을 많이 받지 않았던 것은 박사가 되면 대학에서 교수가 되어야할 것인데 교수자리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나 싶다. 이공계는 30대 초반의 박사가 많다고 하지만 문과에서는 40대 초반 박사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형이는 순탄하게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잘 마치고 1999년에 서정범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한국어와 중국어와의 자음 대응 연구: 한자 전래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제는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대학교수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별을 다는 일이라는 얘기가 있다. 요즘은 무슨 교수, 무슨 교수해서 교수 앞에 많은 이름이 붙고 또 웬만하면 다 교수 명함을 내밀지만 대학에서 교수는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의 네 단계만 정식 교수라고 할 수 있다.

 한 대학의 전임강사가 된다는 것은 곧 그 대학에서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최소한 전임강사는 되어야 교수라고 할 것이다. 교수는 정년이 65세여서 교사보다 3년이 더 길고 특정학과에 교수가 많아야 몇 명이기 때문에 어느 대학이든 정말 교수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나는 지형이가 경희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라도 전임강사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경희대에는 국어학교수가 이미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지형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다. 그런데 해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 박사가 쏟아져 나오니 지형이가 갈 곳이 없었다. 지형이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다른 대학에 나가서도 강의를 하지만 전임강사로 임용이 되는 것은 정말 하늘에 별을 다는 일만큼이 지난했다.

 

 서정범 선생님을 모시고 온갖 굳은 일, 힘든 일을 열심히 했지만 이미 선생님이 국문과의 뒷방마님으로 물려난 뒤라 지형이가 임용되는 일에 힘을 쓰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형이는 서정범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녀보다 더 열심히 모셨다. 나는 이런 지형이가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

 지형이는 경희대국문과 교수로는 임용되지는 못했어도 경희사이버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거기에서 교무처장을 역임했다. 경희대학교와 경희사이버대학교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라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형이가 자기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고 또 열심히 하고 있는 현실에 감사할 뿐이다. 지금, 지형이는 이중언어학회 회장, 문화창조대학원 글로벌한국학전공 전공주임교수, 경희사이버대학교 (외국인 전용) 한국어학과 학과장, 경희사이버대학교 한국어문화학과 교수긴 직함을 가지고 있다.

 

 88학번 규범이는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만나지 못한 후배였다. 내가 대학을 떠난 뒤에 국문과에 들어와서 우리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1998년에 <壬亂期 佛家文學 硏究>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규범이가 내가 국문과를 떠나고 난 뒤에 내 뒤를 이어 우리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지형이가 서정범 선생님을 모시고 하는 것처럼 모든 일을 다 챙겨서 했다. 그래서 선생님을 모실 일이나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규범이에게 연락을 했었다.

 우리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규범이만큼 선생님께 헌신적으로 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선생님하고만 가까웠고 사모님은 어려워해서 집안일은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규범이는 성격이 부드러워서 선생님 집안일도 많이 했던 것으로 안다.

 

 나는 규범이가 우리 선생님 뒤를 이어 경희대국문과에서 임용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게 내 바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국문과에서 여러 강의를 맡기는 했지만 임용이 되기 전에는 늘 불안한 자리여서 걱정을 했었다. 거기다가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규범이는 국문과에서 찬밥신세가 되는 것 같아 불안, 불안했었다.

 규범이는 결국 스스로 경희대국문과를 벗어나 중국에서 살 길을 찾으려 했고 그게 통해서 지금 중국 우한의 사범대에서 전임교수로 강의를 맡고 있다. 중국 대학들은 급여가 많지 않은 대신 교수 가족들을 학교 직원으로 채용을 해준다고 하는데 규범이 처도 그 대학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이 다 중국 우한에 가서 지내고 있다.

 

 규범이는 우한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예전에 자주 메일도 보내고 여러 얘기를 하더니 근래에는 통 소식이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사람들이 자리가 잡히면 굳이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 나는 규범이가 이제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한이 코로나19의 근원지라고 해서 걱정이 좀 되기는 했지만 우한에 산다고 다 코로나에 감염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좀 안정이 되면 그쪽으로 여행을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