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S 5, EOS의 신화를 창조하다

2012. 4. 6. 10:52The 35mm Camera(마루 엮음)

 

 

 

 

 

 

 

 

 

요즘 우리나라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는 전자 제품이든 먼저 한국에 가져와 시험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전엔 한글 설명서가 없어 영어로 된 것이나 일어로 된 것을 가지고 어렵게 공부했지만 요즘은 한국어 설명서가 없는 제품을 보기 어렵다. 또한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상품은 다른 곳에 가서도 절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높아진 것에서도 연유하지만 우리 국민들의 적극성과 무모함(?)에서도 기인한 것이다. 무모함은 막무가내(莫無可奈)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으나 흔히 무대포라고 하는 일본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일에 판단이 서면 그냥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격을 ʻ막무가내ʼ라고 하며 흔히 우리말로 알고 있으나 이 말은 한자어에서 온 말이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이 본인 스스로 판단을 한 것이든 남에게서 듣고 판단을 한 것이든, 그 사람에게 이미 판단이 선 것은 절대 남의 설득으로 바꿀 수 없다. 이런 막무가내의 판단과 적극성은 부정적인 면도 많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런 정신이 우리나라에서 EOS 5의 신화를 창조했다고 얘기하면 지나친 억측이라고 얘기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엔 그렇다.

 

캐논은 1993년에 새로운 EOS 기종인 A2와 A2E를 내어 놓았다. 두 사진기는 기능 면에서는 아주 유사하나 A2는 AF SLR 사진기가 아니고 A2E만 AF-SLR 사진기이다. 이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 때만해도 한국에서 ʻEOS 5ʼ라는 이름으로 선풍적 신화를 일으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화산파의 제자라면 누구나 익히는 것이 매화검법(梅花劍法)이지만 매화검법은 화산파 최고의 검술이라는 점에서 EOS 5를 매화검법에 비유한다.

 

EOS 5는 처음에 한국의 결혼식 사진을 찍는 곳에 쓰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결혼식을 할 때에 야외 촬영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 이 새로운 유행이 있는 곳에 반드시 찾아다니는 것이 캐논 EOS 5와 EF 200mm/f1.8 렌즈였다. 이러한 열풍은 한국에서는 니콘사진기만 통한다는 통설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고 AF-SLR 사진기 시장에서의 캐논의 아성은 니콘을 완전히 넘어서 버렸다.

 

결혼식 야외 촬영이 시들해졌을 때는 한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그 신화를 이어나갔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사진기하면 수동식 사진기이고, 수동식 사진기하면 니콘의 FM2로 인식되던 것이, 캐논 EF 28-105/f3.5-4.5 렌즈를 장착한 EOS 5가 등장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열풍이 한국사람 특유의 막무가내 정신과 적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EOS 5의 가장 큰 특징은 ECF(Eye Controlled Focus)라는 시선 입력 기능과 우수한 저소음, 저진동 기능이다. ECF 기능은 파인더 안의 5개의 측거 점을 기준으로, 응시하고 있는 측거 점에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주는 기능을 말한다.

즉 사용자의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위치를 파인더 내부에 탑재되어 있는 적외선 센서를 통해 측정하여, 응시하고 있는 측거 점에 초점을 맞춰줌으로써 사물이 파인더 중앙에 위치하지 않더라도 구도의 변화 없이 순간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모든 기능들은 0.2-0.3초 이내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며, 단지 시선을 바꿔줌으로써 마음대로 측거 위치를 5개 중 한 곳으로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사용자의 여건에 따라 서로 다른 사용자의 눈동자 정보를 입력할 수도 있는데 다섯 명까지 가능하다.

 

EOS 5는 이러한 시선 입력 기능이 탑재된 최초의 AF SLR 사진기로 측거 방식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사진기는 소음과 진동을 대폭 감소시킨 기종이다. 노출을 할 때 반사경의 진동을 완화시키는 내부 방음 처리로 인해 촬영 시에 소음이 대폭 감소되었으며, 기존의 기어 구조를 대신하여 고탄성 고무벨트를 사용한 구동 장치를 통해 되감기할 때의 소음도 크게 줄어들었다.

 

EOS 5는 우수한 기능들을 장착한 첨단 AF SLR 사진기이다. 새로운 고속, 광역의 AF로 포커싱 스크린의 중앙 15mm에 걸쳐서 5개의 측거 점(測距點 : Auto Focusing Point)이 설치되어 있어 촬영자가 자동 또는 수동으로 선택할 수 있다.

 

싱글 숏 AF와 연속 예측 AF가 있어 사진기가 완전 자동 모드를 사용할 때에는 찍히는 물체를 추적하는 동안에 자동적으로 스위칭 된다. 셔터 스피드 30∼1/8,000초. 5개의 측거 점에 연결되어 있는, 16-존(Zone) SPC에 의한 TTL 주변광 측광, 3.5% 스폿 측광 및 중앙중점 평균 측광이다.

 

노출 모드로는 프로그램 AE, 조리개 우선 AE, DOF AE, PIC AE와 미터에 의한 수동 모드가 있다. 신축(伸縮)되는 강력한 오토 줌 TTL플래시(ISO100 GN43-56/Fit)는 자동 플래시, 적목(赤目) 감소, A-TTL과 TTL 플래시, 측거 점에 연결된 멀티 포인트 TTL 플래시 기능이 있다.

 

이전보다 개선된 위스퍼 드라이브 필름 감기 시스템(Whisper Drive film-Transport System)은 벨트 드라이브와 플로팅 구조(Floating Support)로 EOS 엘란(Elan)보다 2.5X 정도 정숙하며, 연속 촬영을 할 때에 초당 5컷(5fps), 연속 예측 AF시 초당 3.5컷까지 가능하다.

 

이러한 기능들은 발매 당시에 첨단 기능이었지만 그 뒤에 다른 기종들도 앞을 다투어 장착하였기 때문에 꼭 EOS 5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격에 있어, EOS 1보다 훨씬 저렴하면서도 기능면에서는 오히려 대등하거나 한 단계 위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많이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격대비 성능이라는 말이 맞는 말인지는 조심스럽지만 EOS 5를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얘기이다. 캐논이 자랑하는 EOS 1보다, 가격대비 성능에서는 EOS 5가 훨씬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슷한 가격대의 니콘 F801과 비교해도 단연 인정받는 부분일 게다. 다른 기능이나 성능에서는 근소한 차이를 보이지만 ECF기능의 탑재는 그 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비슷했으니 가격대비 성능에서 EOS 5를 능가하는 기종은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업체에서는 AF­SLR 사진기가 나올 때에 표준 줌 렌즈로 대부분 35~70mm/f3.5-4.5가 장착되어 나왔지만, 캐논에서는 EOS 5에 28~105mm/f3.5-4.5 줌 렌즈를 장착하여 내어놓은 것도 이 사진기의 성가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둘 다 비슷한 표준 줌 렌즈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35~70mm/f3.5-4.5 줌 렌즈보다야 28~105mm/f3.5-4.5 줌 렌즈가 훨씬 편리하고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EOS 5에는 사진기에 보조 플래시가 장착된 것이 큰 장점이었다. SLR 사진기에 보조 플래시를 장착한 것은 펜탁스의 SF 시리즈가 먼저이지만 이 사진기들은 기능이나 성능에서 EOS 5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뒤쳐진 것들이라 주목받지 못하고 오히려 EOS 5의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보조 플래시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유용한 것이어서 이것이 장착된 EOS 5는 경쟁기기보다 더 돋보일 수밨에 없었다.

 

EOS 5가 뛰어난 기능의 사진기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캐논의 슈퍼 기종은 아니었다. 캐논은 모든 열정을 EOS 1에 쏟아 부었지만 그 EOS 1보다 EOS 5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거다.

 

내가 펜탁스에만 관심을 쏟으니까 잘 몰라서 그렇다고 얘기할지도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 EOS 5는 사진기의 내구성에 의문이 갈 만큼 약해 보인다. 그것이 EOS 1이나 니콘의 F4와의 비교에서 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어딘지 약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고장이 잦다거나 사진기가 깨진 것은 보지 못했지만 예전에, 캐논 T90을 써 볼 때 느꼈던 그 아쉬움이 그대로 남는다.

 

EOS 5가 나오기 전까지는 한국 사진기 시장에서 캐논은 니콘의 상대가 되지 못했었다. EOS 5가 나오기 전에 미리 나왔던 캐논의 EOS 사진기들은 수동의 FD 렌즈와 호환이 안 되고 기능면에서도 니콘의 F801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EOS 5가 발매되면서 순식간에 AF SLR 사진기는 캐논이라고 인식되었고 선풍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한번 붐을 타면 그것은 엄청난 파장으로 이어지는데 그 역할을 EOS 5가 한국 시장에서 해내었다.

 

EOS 5와 EF 200mm/1.8 렌즈가 웨딩 촬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코닥에서 나오던 ISO 25 필름 생산이 중단되면서부터라고 한다.

 

AF SLR 사진기가 나온 뒤에 한국 시장을 휩쓸던 니콘의 F801, F4는 EOS 5의 등장에 서리를 맞게 되었다. 예전에 나온 『광학세계』라는 잡지에서 보면, AF SLR 사진기 시장에서는 니콘이 캐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통계가 나온다.

 

AF SLR 사진기 시장에서 캐논은 미놀타와 함께 선두 각축을 벌렸고 다른 업체들은 큰 폭으로 뒤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캐논은 EOS 5의 성공으로 세계 사진기 시장에서 AF SLR 사진기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