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6. 11:03ㆍThe 35mm Camera(마루 엮음)
렌즈의 코팅
렌즈의 개발이 전쟁에 사용한 군용 병기 제작을 위해 노력한 결과지만 렌즈의 코팅도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필수 조건이었다. 제대로 만든 렌즈는 코팅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코팅이 되지 않은 렌즈는 렌즈 안에서의 빛의 난반사 때문에 선명한 상을 만들기 어렵다. 흔히 초기에 나온 라이카나 콘탁스의 렌즈들은 코팅을 안 했어도 사진을 찍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나 코팅을 하지 않은 일제 렌즈들은 얘기가 되지 않는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가을, 싱가포르에 독일의 잠수함이 기항하였을 때 독일의 장교들이 지니고 있었던 쌍안경의 렌즈는 청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 쌍안경을 들여다보면 시야가 환하게 밝아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독일에서는 반사방지막(反射防止膜)이 실용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렌즈의 표면에 얇은 막(膜)을 입히면 빛의 반사를 방지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 기술은 이미 19세기 말 데니스 테일러에 의해 발표되었던 기술이다.
푸른빛이 도는 독일 쌍안경의 렌즈를 보고 온 일본 장교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그 시대의 광학기기는 해군에게 있어 중요한 병기 중 하나였으며, 특히 쌍안경은 해군장교들에게 있어 눈과도 같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광학 병기(光學兵器)는 이미 이전부터 렌즈의 제조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렌즈의 제조 기술에 있어서 일본은 독일에 한참 뒤쳐져 있었고 일본은 그때까지 렌즈에 코팅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거였다.
1941년 11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독일에 파견되었던 일본의 민관(民官)합동 독일기술조사단이 귀국하였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해군의 마츠오(松尾) 대좌는 “독일에서는 렌즈의 표면에 막을 입혀 빛을 정확하게 통과시키는 처리 기술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라고 보고 하였으나(『日本光學工業史』:1950년 간행), 이 기술은 동맹국인 일본조사단에게조차도 견학을 허락하지 않았던 극비 기술이었다.
진공증착(眞空蒸着)의 코팅 기술은 1935년, 미국의 스토론의 논문에 의해 발표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코닥에서도 6년이나 뒤늦게 코팅 기술이 가능하게 되어, 1941년에 엑트라(-Ektra) 렌즈에 전면 채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일본의 출발이 늦어졌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군과 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의 코팅 연구
1942년 5월, 일본 해군은 요코스카(橫須賀市) 공창(工廠=군에 직속되어 군수품을 제조하던 공장) 아오키(靑木)대좌의 지휘 아래 〈광학 병기의 투과율을 양호하게 해주는 연구〉 라는 과제로 모리타(森田)가 주무 담당이 되어, 서서히 연구에 시동을 걸었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산(酸)을 처리하여 유리의 표면에 규산막(珪酸膜)을 입히는 방법으로 일단의 성과를 올렸다. 그 연구 성과가 〈광학 병기의 투과율을 양호하게 하는 연구〉의 제 1성과였다.
제 2차는 다중막(多重膜)을 사용하여 반사(反射)가 제로(0)가 되는 조건을 파동방정식(波動方程式)으로부터 찾았던, 1943년의 보고서였다. 이것과는 별도로 진공증착법(眞空蒸着法)으로 불화칼슘의 막(膜)을 씌워보려는 연구가 시도되었었으나,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모리타는 증착기(蒸着機)의 진공도(眞空度)를 높이기 위한 개량 연구에 매우 고심하고 있었지만 당시 가능했던 방법은 산 처리(酸處理)에 의한 방법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산 처리에 대한 강습회를 요코스카(橫須賀)에서 개최하여 각지 공창(工廠)의 담당자들이 모여들어 산 처리의 실습에 대해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산 처리(酸處理)방법에는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 처리에 의해 유리에 예상치 못했던 결함과 부식이 확대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처리방법은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현실적으로 진공증착법(眞空蒸着法)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리타였으나, 그 실현을 위한 수난과 노고가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천연의 빙정석(氷晶石=수정?)을 사용하여 연구를 거듭했으나 자연산은 다량으로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인조빙정석(人造氷晶石)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빙정석을 가스로 화로에서 가열하여, 렌즈에 그것을 증착하면 양호한 막(膜)이 생성되었는데 이것이 일본이 처음 시작한 코팅방법이다.
그 즈음, 나고야(名古屋)대학의 우에다(上田良二)교수도 빙정석을 사용하여 실험적인 장치로서 튼튼한 막을 만들었으며, 1943년에 그 결과를 『응용물리』지에 발표되었다. 그 후 모리타는 우에다 교수를 방문하여 만나 서로의 성과에 대해 확인하였다.
모리타는 1944년 가을부터 스스로 독립하여 자비(自費)로 자신만의 아이디어에 의한 증착기(蒸着機)를 연구 개발하였다. 모리타의 증착기는 당시로는 상당히 정교한 것으로 커다란 잠망경의 콘덴서(:condenser) 렌즈의 양면을 일회에 증착하는 것이 가능토록 하는 2층(層)구조로 되어 있었고, 텅스텐 증발(蒸發) 소스(sauce)가 위아래에 6군데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소스(sauce)에 사전에 미리 무게를 맞추어 두었던 빙정석을 놓은 후, 전부 한꺼번에 증착시키면 적절한 두께의 막이 입혀졌다. 이 증착기를 사용하여 코팅의 필요가 더욱더 높았던 잠수함의 잠망경을 코팅하였고 이것은 실제로 배치되었다.
코팅처리가 된 잠망경은 그 투과율이 2~3배가되어 여명(黎明), 황혼(黃昏) 무렵에 있어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였다. 잠수함은 이런 어두컴컴한 시간대에 은밀하게 적에게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하는 것이 기본 임무였다. 그렇기에 요코스카(橫須賀)에 입항하는 잠수함들은 그들의 망원경에 코팅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각 해군공창(工廠)에서는 코팅을 실시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이를 위해 1944년 봄, 요코스카(橫須賀)에서 강습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각지의 해군공창의 광학기술자 외에도 일본광학(日本光學), 동경광학(東京光學)의 기술자도 참가하였다.
해군 관계자들은 코팅 증착기를 요코스카(橫須賀)로부터 각 공창에 배치하였으며, 해군공창에서는 빠르게도 7월부터 수리를 위해 입항했던 잠수함의 광학병기 렌즈 전부에 코팅을 입혔다.
모리타는 「투과율(透過率)을 양호하게 해주는 연구」와 「증착기에 의한 코팅 기술」을 제 3차 회의에서 발표하였다. 1944년 9월에 민간회사인 일본광학(日本光學, 니콘), 동경광학(東京光學), 치요다광학정공(千代田光學精工, 미놀타) 등에 그 장치가 보급되었으나, 이들 업체의 반응은 해군공창보다 적극적이지 못했다.
일본광학이 1939년경부터 해군에 납품하였던 물건들은 코팅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별 수 없이 해군이 직접 그것들을 다시 분해하여 렌즈에 코팅을 입히고 재조립한 후, 함선에 장착할 수밖에 없었다. 해군에서는 코팅이 된 광학기기가 필수였으나 일본 광학에서는 아직 코팅을 정상적으로 실시할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놀타에서도 이 장치를 두고 힘겨워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반 업체에는 이것을 검토할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군이 아무리 강조를 해도 광학회사들에게 있어 렌즈의 코팅은 참으로 중요하면서도 골칫거리 같은 문제 중의 문제였다. 그것은 당시의 광학업체들에게 있어서는 친숙치 않은 진공기술(眞空技術)과 화학지식이 부족하였던 탓이었다.
계속해서 육군과 해군, 그리고 오사카공업시험소에서 진행되었던 연구는 진공증착법(眞空蒸着法)에 의한 불화마그네슘 코팅 기술이었다. 그들은 안정적인 방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진공증착법의 확립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한 연구원들의 업적은 후일 일본의 렌즈 회사에 전승되었고, 그 성과는 전후(戰後)의 일본 사진기산업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오사카공업시험소에서 코팅 기술에 전념했던 아사코시(淺越)는 『대공시(大工試) 50년史』에서, “군은 코팅에 기를 쓰고, 연구를 재촉하였다. 연구소의 기술자들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그 방법을 완성하였다. 12Cm망원경 렌즈에 코팅 처리를 하여 그 렌즈를 요코스카(橫須賀)에 가지고 가게 하여, 부근의 야산에서 해질녘과 어둠이 깔릴 무렵, 해가 뜨는 시간대에 성능을 확인한 결과, 그 효과에 대해 실감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 기술을 이제부터 모든 광학 병기에 시술하여 전선(戰線)에 보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종전(終戰)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때 연구했던 기술이 지금은 어떠한 렌즈에나 다 처리되어 있는 반사방지 처리의 근원이었다. 이 진공 속에서의 박막증착(薄漠蒸着)의 기법은 이 후 오사카공업시험소의 자랑할 만한 성과들 중 하나였었다.
전후(戰後) 사진기 렌즈의 코팅
패전(敗戰)을 맞이하여, 해군대좌 무라다(村田)는 미놀타의 연구부장으로 초빙되었다. 이 후 무라다는 사진기에 해군시대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중 코팅을 제일 우선 과제로 올렸다.
미놀타는 전후(戰後) 렌즈 코팅의 출발에서 업계 중에 가장 빨랐다. 그것은 당시 해군의 요청으로 코팅의 양산화 기술에서 실무적인 책임이 높았던 오사카공업시험소가 지리적으로 가깝고, 해군 광학기술의 전문가인 무라다가 초빙되어 기술도입의 교량 역할을 재빠르게 행하였던 덕이었다.
1946년에 발매된 ‘미놀타 세미ⅢA’ 에는 마젠타(magenta)색을 입힌 75mm/f3.5 코팅렌즈를 장착하였다. 이 렌즈가 미놀타가 설계에서부터 제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사(自社)에서 처리한 최초의 로커(Rokkor) 렌즈였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에서 최초의 불화마그네슘을 진공증착법에 의해 증착하여, 대량 생산된 사진기용 코팅 렌즈라고 말할 수 있다.
미놀타는 미놀타 세미 렌즈가 세계 최초의 코팅 렌즈라고 자랑했지만 세계 최초의 코팅 렌즈는 차이스였다. 그렇긴 해도 미놀타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패전한 뒤 1년 만에 코팅 렌즈를 생산하게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고 벅찬 일이었다.
이즈음 렌즈 코팅의 필요성이 사진기와 쌍안경 업체들에게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전문업체인 도쿠다(德田)제작소가 진공증착기의 발매를 시작하였다. 이후 렌즈 코팅은 폭넓게 보급되어, 2차 세계 대전 시대부터의 대난문(大難問-크게 어려운 난관)의 코팅이라 불리던 첨단기술도 급속도로 보통의 기술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단 코팅으로 하던 것을 이제는 겹 코팅이 도입되어 대부분의 렌즈나 필터는 멀티코팅을 하고 있으며, 펜탁스의 SMC 코팅 렌즈들은 우주선에 이용되는 여러 겹의 코팅을 자랑하고 있다.
참고문헌 : 클래식카메라전과 번역 : 최석용(로커클럽에서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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