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6. 11:01ㆍThe 35mm Camera(마루 엮음)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일본광학의 사진기 진출
일본제 사진기가 미국과 유럽의 시장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이며, 이는 대부분 미군 군정(Occupied Japan)하에서 제작된 것들이다. 전쟁 후 일본으로 들어왔던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일본의 공업 잠재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시아에 그런 기술력을 가진 나라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던 거다. 이미 일본은 사진기와 렌즈에 관해서도 높은 기술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사진기와 렌즈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군수 물자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제 사진기가 서구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50년 한국 전쟁에서 취재한 미국의 사진 기자(photo-journalist)와 군인들이 일본제 렌즈와 사진기의 뛰어나 품질을 발견했고, 이 우수성들이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사진기 산업은 이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으며 일본 사진기 메이커들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1970년대 이후에는 세계 사진기 시장에서 독일을 완전히 밀어내고 그 점유율도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의 사진기 메이커들은 독일처럼 고가의 사진기를 생산하여 소수에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 생산으로 인한 원가 절감과 사진기의 대중화에 노력하여 그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갔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제 사진기의 등장으로 사진기는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중산층의 가정에도 필수품이 될 수 있었다. 그 일본 사진기 산업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니콘이며 니콘의 전신은 일본광학(日本光學)이다.
일본광학은 처음엔 일본광학공업으로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사와 과학 분야용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광학 제품을 제조했다. 그 중에는 현미경, 망원경, 측량기기, 쌍안경, 잠망경, 항공 렌즈, 육분의(六分儀), 경위의(經緯儀), 마이크로테스터 및 관련 기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2차 대전의 발발로 일본광학공업은 일본군의 광학 군수품의 중요한 공급자가 되었으며 공장은 20개로 늘어나고 종업원 수는 23,000명에 이르렀다. 일본 육 · 해 · 공군에서 사용되는 광학 기기의 대부분은 일본광학공업에서 제조하였다.
종전 후 미군에 의해 공장은 한 개로, 종업원 수는 1,400명으로 줄고 비군사용 일반 시민 제품을 생산토록 재편성되었다. 일본광학은 즉시 전쟁 전에 만들었던 과학과 산업용의 몇 가지 정밀 광학 기기를 만들었으나 일반용 사진기는 아직 제조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전쟁 전에는 유명한 한사 캐논(Hansa Canon)을 포함하여 사진기용 렌즈를 제조하였으며, 실제로는 1947년까지 모든 캐논 렌즈를 만들었고, 캐논 베이어닛 렌즈뿐만 아니라 라이카 타입 스크루 마운트용 렌즈도 생산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1945년에 일본광학은 제품 라인을 확대하기 위한 시도로 사진기 분야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35mm 사진기용 렌즈를 만든 이후로 동일한 렌즈를 사용하는 사진기를 제작키로 한 것은 논리상 필연적인 단계였다. 개발에 들어간 사진기의 종류는 거리계(RF, Range Finder) 연동 사진기와 이안 반사(TLR) 형식 사진기로, 처음에는 TLR 사진기가 우선되었다. 그러나 프론트 형 렌즈 셔터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점이 문제여서 셔터를 자급하는 것이 검토되었으나 비용이 많이 드는 관계로 포기하였다.
그래서 RF 사진기로 방향을 선회하여, 콘탁스 방식의 베이어닛 마운트와 라이카 방식의 포막 횡 주행 방식 셔터를 겸비한 S 시리즈 사양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결정한 배경에는 렌즈 공급선으로서의 10여 년의 ʻ동반자ʼ가 되는 캐논사가 만든 라이카 마운트의 사진기와의 경합을 하지 않기 위한 배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 직후 사진기의 제품화는 ʻ연구 과제ʼ로서 선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주둔한 미군 장병들에게 일본제 사진기의 인기가 높다는 점에 착안하여 미국에 대한 수출품으로서 유망한 점이 있어 단번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선도적인 35mm 사진기, 콘탁스와 라이카의 장점을 연구해서 새로운 니콘 디자인에 좋은 특징들을 많이 조합시켰다. 종전을 계기로 민수품의 요구로서 시작한 일본광학의 사진기 개발은 콘탁스와 라이카로 그 인기가 양분되어 있던 RF 사진기 시장을 노린 거였다. 니콘 사진기는 RF 사진기인 S 시리즈를 내어 놓으면서 시작되었다. 1946년 9월 최초의 사진기 디자인을 완료하고 일본광학(NIppon KOgaku)에서 이름을 따서 니콘(NIKON)이라고 붙였다.
니콘은 강호에서 무당파의 자리에 놓으면 마땅할 것이다. 무당은 그 시조가 장삼봉인데 장삼봉은 원래 소림파 각원 대사의 제자였다. 스승이 입적한 뒤에 스스로 무당산에서 깨달음을 얻어 무당파를 창시했지만 원 뿌리는 소림에서 온 것으로 봐야한다. 그래서인지 무당파는 강호에서 이야기될 때 항상 소림과 비슷하거나 소림 다음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무당파에는 태청강기(太淸剛氣), 태극권(太極拳), 태극혜검(太極慧劍), 오행검진(五行劍陣), 제운종(梯雲縱)을 알아주는데 니콘의 F 시리즈 사진기들은 무당파의 절기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거다,
일본광학은 RF 사진기로 시작하였으나 니코매트 SLR, 니콘 SLR, 니콘 AF SLR 등 SLR 사진기와 수중 사진기인 니코노스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사진기 역사에서 보듯이 제품이 유명해지면 회사 이름을 브랜드 이름으로 변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88년 일본광학은 회사이름을 니콘(Nikon Corporation)으로 변경했다. 이미 니콘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기를 내어놓았지만 2차 대전의 군수물자를 생산했던 일본광학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시대에 걸맞게 바꾸고 싶었을 것이라고 본다.
니콘 RF 사진기
니콘이 RF 형식의 사진기를 내어 놓았다는 과거를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니콘도 처음 시작은 RF 형식의 사진기였다. 초창기 일본 사진기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니콘도 당시에 잘 나가던 독일의 RF 형식의 사진기들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캐논이 라이카의 사진기들을 모방한데 비하여 니콘은 콘탁스의 사진기를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흔히 니콘이라는 이름을 니뽄의 콘탁스에서 온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니콘은 콘탁스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콘탁스와 라이카의 장점을 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RF 형식의 사진기들이 니콘 S, S2, SP, S3, S4, S3M 등이다.
니콘 S는 1951년 1월 도입되었으며 새로 설계된 50mm/f2.0 렌즈를 표준 렌즈로 장착했다. 그 후 같은 해 50mm/f1.4 렌즈가 곧 추가로 시판되기도 하였다. 니콘 장비로 한국 전쟁을 취재했던 『Life』지의 사진 기자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니콜 렌즈와 니콘 S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미국 내 사진기 시장에서 아주 큰 스타( Head star in the US market)로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미국 기자들이 압록강 부근에서 니콘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나왔던데 그것은 확실하지 않은 얘기이다. 왜냐하면 니콘에서 내어놓은 사진기 중에 그래도 쓸 만한 것이 니콘 S인데 S가 발매된 1951년에는 우리나라 군이 압록강까지 올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야기라는 것이 돌아다니며 커지기 마련이지만 이런 것은 짚고 넘어가야할 이야기이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더글라스 덩컨이 한국에 전쟁이 났다는 말을 듣고 미국으로 사진기를 가지러 가려는데 일본 렌즈가 많이 좋아졌다고 써 보라는 권유를 받고 썼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에 덩컨은 렌즈는 니콘의 것을 사용했지만 사진기는 일제를 믿을 수가 없어 그대로 라이카를 사용했다는 얘기를, 확실하게 아는 분에게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전쟁 덕(?)에 니콘이 알려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앞장을 섰을 원흉 중의 하나인 일본광학이 한국 전쟁으로 인해 살아났다는 것은 참으로 입맛이 쓴 일이다.
니콘 S2는 1 : 1 확대 비율의 뷰파인더 프레임을 갖추고, 필름을 레버 감기로 전진시키는 방법을 택했으며 새로운 1/1,000초 셔터 스피드를 채용하였다. S2는 여러 가지 구조적, 기능적 문제를 개선한 새로운 면모를 갖춘 사진기였다. 또한 설계의 합리화로 인해 중량을 대폭 줄였다. 이는 니콘의 진화를 보여준 확실한 기기였으며 1958년 3월 생산이 중단될 때 까지 약 56,000대가 판매되었다.
니콘 SP는 1957년에 니콘이 야심작으로 내어 놓은 사진기이나 라이카의 M3에 밀려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SP는 가장 잘 알려진 뛰어난 니콘 RF 사진기로 디자인에서 독창성이 엿보였다. 약 23,000대가 생산되었으며 착탈식 뒤판은 모터드라이브용 뒤판으로 대체할 수가 있었다. 초점거리 28mm∼135mm 범위까지 6가지 렌즈용의 만능 뷰파인더가 부착되었다. 인기 있는 모터드라이브 뒤판 때문에 20년 동안 니콘의 모터드라이브 사진기를 우세하게 만들었다.
ʻ니콘ʼ 로고는 더 이상 렌즈 위에 두지 않고 셔터 릴리스 아래로 치우치게 하였다. 50mm/f2 또는 f1.4 렌즈가 표준 렌즈로, 블랙과 크롬의 두 가지가 있다. 당시의 모델 SP의 가장 뛰어난 특징 중의 하나는 사진기 넓이의 거의 절반은 차지하는 전면 뷰파인더 창의 넓은 범위이다. 이것은 RF와 함께 두 가지 뷰파인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표준 뷰파인더는 RF와 함께 동일한 아이피스 안에 있으며, 몸체 위에 있는 다이얼에 의해 50mm 렌즈에서 135mm 렌즈까지의 초점 거리에 적합하게 조절하였다.
니콘 SLR 사진기
라이카의 M3 사진기는 다른 업체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기에 일본 사진기 메이커들은 M3 사진기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일안반사(SLR) 형식의 사진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펜타프리즘의 발명은 1949년 콘탁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만으로 SLR 사진기가 완성될 수는 없었다. 1957년의 아사히펜탁스의 퀵 리턴 미러 장치와 1959년, 마미야의 자동 조리개 장치가 나온 뒤에야 비로소 SLR 형식이 새로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당시에 일본 정부는 사진기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기 나라에서 발명된 장치들은 업계가 서로 공유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이런 방식은 일본 사진기 전체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니콘이 내어놓은 사진기가 본격적 SLR 형식의 니콘 F이다.
니콘 F는 1959년에 내놓은 니콘 최초의 SLR 사진기로 지난 40년 동안 전문가들에게 압도적인 선택을 받은 기종이다. 모듈러 디자인으로 교환용 아이레벨 뷰파인더 및 포커싱 스크린을 갖추었고, 모터드라이브와 다양한 교환용 니콜(Nikkor) 렌즈를 구비했다. FP 셔터. 1∼1/1,000초와 B 셔터 등 당시엔 획기적인 최고의 사진기로 F2가 선보인 이후에도 1974년까지 100만 대 이상이 판매되었다.
라이카가 M3의 성공으로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니콘과 일본의 다른 업체들은 RF 형식의 사진기에서 SLR 형식의 사진기로 세계 사진기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은 거였다.
니콘은 니콘 F의 성공에 힘입어 F포토믹, F포토믹 Tn, F 포토믹 FTn 등을 만들었고, 1971년에는 한층 성능이 개선된 니콘 F2를 내어 놓게 된다. 니콘 F2는 니콘 F의 개선 기종으로 셔터 스피드 범위가 10초∼1/2,000초까지 업그레이드되고 반사 미러가 더 커졌다. 모터드라이브를 장착하면 초당 5컷까지 연속 촬영이 가능하다. 크롬과 블랙의 두 종류가 있다.
니콘은 1980년에 완전 기계식 사진기에서 벗어난 시스템 사진기로 자동 노출 기능을 가진 최고급기 니콘 F3를 내어 놓았다. F3의 특징은 전자식 셔터지만 반사 미러와 필름 감기는 배터리가 없어도 1/80초와 B에서 작동한다.
F3는 교환용 파인더와 모터드라이브를 가진 전문가용 사진기로 전자적으로 작동하는 티타늄 포일 셔터는 무단 8∼1/2,000초이며, LCD 디스플레이 패널이 내장되었다. 사진기 내부 밀러박스 안의 실리콘 셀(Silicon Cell)에 의한 중앙중점 측광(80/20%) 및 자동 플래시 필름 면 반사 측광(TTL OTF)이 가능하고, MD-4 모터드라이브는 초당 최고 6컷까지 필름을 감는다.
표준 아이레벨 파인더 DE-2 외에도 22종의 포커싱 스크린을 갖추었다. 니콘 F3 HP(High Eye Point)는 1982년에 나온 기종으로 새로 개발된 파인더 DE-3는 통상적인 아이레벨 뷰잉에 25mm의 아이릴리프(Eye Relief) 거리를 주어 안경을 쓴 사람과 수중 하우징용으로 디자인되었다. 이 기능은 F3 버전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 이후 모든 기종과 변형 제품에 하이 아이 포인트 파인더는 표준이 되었다. 파인더의 왼쪽 아래에 "HP"로 확인할 수 있다.
니콘 F3T는 티타늄(Titanum) 몸체의 F3로 일반적으로 가장 튼튼한 F3로 간주되고 있다. 뷰파인더, 탑 플레이트, 베이스 심지어 뒤 덮개까지 주요 부품으로 보호되고 있다. F3T의 1세대는 샴페인 크롬(Champagne Chrome)으로 처리되어 F3 기종의 변형 제품 중에서 가장 우아한 외관을 가지고 있으며 수년 후 이 사진기는 블랙페인트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 중에 니콘 F3를 안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F3는 인기 기종이었다. 캐논의 F-1과 그 성능 면에서 비슷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진을 한다고 하면 니콘 사진기를 가져야하는 줄 알았고 그 중에서도 F3는 단연 최고의 사진기였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F3에 모터드라이브까지 장착한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90% 이상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니콘 F4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내어 놓은 제4세대 전문가용의 시스템 사진기이다. 니콘 F4를 발표할 당시에 상호를 공식적으로 일본광학(Noppon Kokagu)에서 니콘(Nikon Corporation)으로 변경하였다. F4는 이전의 F에서 모듈러 디자인의 사양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멀티 패턴 측광용 표준 파인더 DP-20을 포함하여 다양한 뷰파인더와 새로 개발된 B타입 브라이트 뷰 스크린을 표준으로 하여 12종의 교환용 스크린을 구비하였다,
프리즈 포커스(Freeze Focus), 자동 노출 브라케팅 등의 첨단 기능의 교환용 뒤 덮개(필름 백), MF-23 다기능 필름 백과 MF-24 250매용 벌크 필름 백이 갖추어져 있다. 전원의 옵션으로 F4, F4s, F4e와 같은 기종이 있다. 니콘 F4는 전통적인 F 시리즈와 AF사이의 브리지 모델(Bridge Model)이다. 기본적으로 수동 포커스의 SLR의 핵심에다 최신 AF기술을 접목시켰다. 그 결과 초기 몇 년 사이에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모델이 되었다.
F4를 발매하기 전에 나온 니콘 F801은 F4와 그 성능에서는 아주 비슷했지만 전문가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전문가들은 대부분 F4를 선택하고 F801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니콘 F5는 1996년에 발매되었다. 이 새로운 F5는 최신 SLR 사진기로 초당 8컷의 완전 AF작동 시에 다른 AF 시스템보다도 60%정도 빠르다고 한다. 다이내믹한 AF는 동체도 선명하게 추적한다. 5개의 센서로 된 AF 탐지 시스템(TTL 위상차 검출 방식)은 사진기가 수직일 때에도 중심에서 벗어난 물체를 포착할 수 있다. 최초로 사진기에 내장된 RGB컬러감도 측광 미터는 프레임을 불연속의 1005개의 유닛으로 나눈 다음 광과 색 패턴을 분석하여 이것을 사진기 내부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수천 개의 이미지와 비교한다.
사용자는 정확하고 좁은 영역의 측광을 위하여 중앙 중점 측광의 영역 크기를 8mm에서 20mm까지 조절할 수 있다. 기타의 사용자 조절 기능은 Mac이나 PC에 연결하여 소프트웨어로 가능하다.
2004년에 니콘에서 발매한 F6는, 각 분야의 프로 사진가로부터 사진 애호가까지 많은 촬영자들을 고려하여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니콘의 기술이 집대성된 사진기이다. 놀라운 고품질, 극도로 높은 신뢰성, 촬영을 쾌적하게 하는 조작성을 실현하고 있다고 니콘은 설명하고 있다.
F6의 셔터 유닛은 15만 회의 릴리스 테스트를 통한 높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셔터를 릴리스 할 때마다 셔터 스피드를 자동으로 체크하여 보정하는 셔터 모니터를 내장하여 정밀도를 확보하고 있다. 고정밀도, 고속 오토 포커스를 가능하게 하는 11Point 측거 AF 시스템과, 정밀도를 높인 3D-RGB 멀티 패턴 측광, 최첨단의 스피드 라이트 컨트롤을 가능하게 하는 크리에이티브 라이팅 시스템, 그리고 저소음, 저진동의 기분 좋은 조작음과, 뛰어난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최고 초당 약 8컷(별도판매 MB-40 장착 시)의 빠른 연속 촬영 등의 최첨단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프로 유저들의 요구에 100% 대응한다.
상부 하부 커버 및 앞부분 몸체에는 가볍고 튼튼한 마그네슘 합금을 사용했고, 필름 가이드 레일을 탑재하는 뒷면 몸체에는 알루미늄 합금을 채용하여 높은 견고성과 경량화를 실현하였다. 게다가 엄격한 기준에 근거하는 수많은 테스트를 통하여, 각부의 사양을 철저하게 검증, 개선하여 높은 방적 · 방진 성능을 실현하였다.
이미 대다수의 일본 사진기 메이커들이 필름 사진기를 포기한 상태인데 니콘이 계속하여 최고급 니콘 F 시리즈 사진기를 내어놓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바로 일본 사진기가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자부심이라고 할 것이다. 니콘은 이밖에도 수많은 사진기를 내어 놓았지만 니콘에서 얘기하는 진정한 전문가용 사진기는 니콘 F에서 시작하여, F2, F3, F4, F5, F6로 이어진 모델들이다.
나는 솔직히 니콘 사진기를 싫어한다. 니콘이라는 이름도 싫고 일본이 가장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이 니콘 사진기라는 것도 싫다. 그래서 니콘 사진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니콘이 일본 사진기의 자존심이라고 얘기해도 누구하나 이의를 달지는 못할 거다. 니콘은 그만큼 혼신의 노력을 하였기에 그만한 결실을 이룬 거였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사진기 시장을 휩쓸게 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오랜 시간 땀 흘려 노력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보다 좋은 사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 사진기업계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니콘이다.
한국에서 니콘 사진기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일등 공신은 아남정밀이다. 밀수로만 들어 올 수 있었던 일본의 고급 사진기들이 1980년 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서 라이선스로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아남정밀과 제휴한 니콘이 가장 큰 덕을 보았다.
아남정밀은 처음에 대한광학을 인수하여 ʻ레믹스ʼ라는 사진기를 만들고, 마미야 645 사진기를 수입하여 판매를 하다가 니콘과 제휴하여 니콘 사진기를 라이선스로 들여와 ʻ아남 니콘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는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올라가면서 고급 사진기를 살 정도가 되다보니 다른 메이커의 것보다 고급인 아남정밀에서 들여 온 니콘 사진기들이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FM2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니콘에서 가장 성공한 최고의 사진기는 한국에서 성가를 높인 니콘 FM2로 자리매김 되었다.
'The 35mm Camera(마루 엮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이 흘린 눈물과 땀 (0) | 2012.04.06 |
---|---|
일본, 렌즈 코팅을 시도하다 (0) | 2012.04.06 |
니콘 FM2, 2류가 1류를 잡다 (0) | 2012.04.06 |
난형난제(難兄難弟), 캐논 (0) | 2012.04.06 |
EOS 5, EOS의 신화를 창조하다 (0) | 2012.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