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흘린 눈물과 땀

2012. 4. 6. 11:06The 35mm Camera(마루 엮음)

 

 

 

 

 

 

일본, 사진기 렌즈를 꿈꾸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사진기는 독일 제품을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쉽게 생각해서 니콘은 콘탁스를 복제하면서 성장했고, 캐논은 라이카를 본뜨면서 발전했다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기술력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닦아온 탄탄한 기반 위에 피땀 흘리며 노력한 이름 없는 기술자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기에 1970년대에 들어와서 세계 사진기 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인의 장인 정신을 세계 최고로 치지만 일본인의 장인 정신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일본인들의 사진에 대한 애착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흔히들 ʻ안경을 쓰고, 어깨에는 사진기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사람은 일본인이다ʼ라고 이야기될 정도로 일본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일본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게르가 사진술을 발명하였던 1839년으로부터 단지 9년이 지난 1848년에, 사진기가 네덜란드의 항구를 떠나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전해지면서 일본인들과 사진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은염 사진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지 불과 18년 후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초상(肖像)사진을 찍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최초의 사진 렌즈

 

초기에 거의 단독으로 일본의 사진업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은 코니시쿠로(小西六, 코니카)였다. 1925년에 해군 함대 본부로부터 ʻ사진 총(寫眞銃 : 비행기의 기관총 대신 명중 판정에 사용)ʼ의 주문을 의뢰받고 제작하였는데, 아직 국산 렌즈를 개발한 곳이 없어 외국제 렌즈를 부착하여 납품하였다.

그런데 당시 해군에서는 군용 무기에 일본 국산 렌즈가 장착되기를 기대하고 있어 그것이 문제였다.

 

 그 무렵 코니카에서는 광학 재료와 광학 기기를 많이 수입하고 있었다. 해군의 국산 렌즈 장착 요구를 계기로 하여 렌즈 설계에 대한 연구가 시작이 되었으며, 수입 일변도의 구조에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자사 생산(自社生産)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 장전(藏前)고등공업(現, 동경공대)을 졸업한 모리 히로오(毛利廣雄)는 렌즈 설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1927년경에는 혼자서 자체 설계의 렌즈 개발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해외 문헌을 읽어 가면서, 수입품 렌즈를 분해하는 등 혼자서 어려운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1931년 봄, 목표를 독일의 뎃사 렌즈에 두고 시작을 하였던 모리(毛利)의 렌즈는 겨우 완성이 되었으며 그 해 6월 헥사 105mm/f4.5 렌즈로 스프링 사진기에 부착이 되어서 발매가 되었다. 이것이 일본 최초로 대량 생산이 된 본격적인 렌즈였다. 1935년대에 접어들면서 헥사 렌즈는 더욱 더 다듬어졌고 독일의 뎃사 렌즈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얻었다.

 

 

ʻ일본광학ʼ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광학 공장의 설립이 잇달았다. 해군이 미쯔비시(三菱)에 설립하였던 일본광학(日本光學, 지금의 니콘)은 사진기 회사가 아니라 측거기(測距機=측량기) 등의 광학 무기를 만드는 목적의 군수 공장으로서 탄생하였다.

 

일본광학의 역사는 그 이름과도 같이 일본의 광학 산업사(光學産業史)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광학은 재벌회사로서 그리고 국책 회사(國策會社)로 탄생하여 정부의 특별한 지원을 받으면서 커가고 있었다. 특히 광학 기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렌즈의 설계·제작에 있어서 렌즈의 본고장인 독일의 정통 기술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것은 동종 업계의 다른 회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혜택으로, 나중에 니콜 렌즈를 만들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에 패한 독일에는 직장을 구하는 우수한 기술자가 많았다. 당시 일본광학에서는 그 다음 해에 이사인 후지 류조우(藤井龍三)를 독일에 파견하였고, 베를린대학에서 유학을 하여 독일 통이었던 후지 류조우는, 하인리히 아하토를 비롯한 8명의 우수한 인재를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독일인 기술자들이 일본에 와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중에서 아하토는 일본광학의 일본 기술자들에게 렌즈 설계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많은 후계자가 그에 의해서 육성되었다. 독일어로 진행된 그의 강의는 번역되어 책자로 일본에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6년 뒤늦게 렌즈 설계의 공부를 거의 독학으로 마친 코니카의 모리(毛利)에 비교해 본다면, 훌륭한 가정교사에게 풍부하게 교육을 받은 왕년의 일본광학의 사람들은 큰 혜택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광학 쪽에서는 사진 렌즈만을 주로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연구가 진행된 분야는 광학 무기의 기초가 되는 망원경의 설계에 있었다. 이 시절 독일인들로부터 렌즈 설계 기술을 습득한 핵심적인 인물로는 독일인 기술자들이 오기 얼마 전에 입사를 한 쓰나야마 쓰미노(砂山角野)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흘러 1928년 쓰나야마(砂山)는 해군의 촉탁으로 인해 유럽의 광학 공업을 시찰하게 되고 칼 차이스의 뎃사 등의 사진 렌즈를 몇 종류 가지고 오게 된다. 당시 칼 차이스는 세계 광학 기술의 최고봉과도 같은 존재로써, 일본에서 갓 이를 배우러 온 쓰나야마에게 있어서는 손도 내밀어 볼 수 없는 높은 회사로 여겨졌다. 때마침 다음 해에 그는 군부의 명령으로 항공사진 렌즈의 제작을 위촉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쓰나야마는 스스로 사진 렌즈의 설계를 시작하여 그로부터 3년 후인 1932년에 뎃사 구조의 사진 렌즈인 ʻ아니타ʼ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쓰나야먀의 다음 과제는 35mm 필름용 렌즈를 만드는 일이었다. 라이카의 엘마(뎃사 구조 50mm/f3.5) 렌즈를 입수하여 이것을 분해하여 모방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는 본격적인 사진 렌즈를 만들고 싶었다.

 

 

"라이츠가 가능한 일이었다면 우리들도 충분히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엘마 렌즈를 분해하고 철저하게 데이터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모방하여 그것과 비슷한 렌즈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시험 제작한 렌즈를 엘마 렌즈와 비교하던 날,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쓰나야마는 그대로 맥이 빠져 버렸다. 그는 다시 재도전하여 엘마를 측정하고 고쳐서 수차 곡선(收差曲線-렌즈의 영상이 확실히 비치치 않은 현상을 나타내는 선)의 수정을 거듭하여, 다시 테스트 렌즈를 제작하여 봤지만 역시 라이츠의 엘마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렌즈의 두께와 간격을 바꾸어가며 테스트 타입 렌즈를 그 후로도 10회 이상이나 만들었다. 시작품(試作品)이 완성되면 스스로 촬영하고 암실에 들어가 비교 대조하며 고치기를 반복했지만 그 때마다 매번 성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쓰나야마의 엘마는 고심초사 끝에 그럭저럭 완성이 되었고 이 렌즈는 세이키광학연구소(精機光學硏究所)가 발매했던 캐논의 사진기에 부착하는 렌즈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35mm 사진기 렌즈였다.

 

1919년 타카치호광학(高千穗光學 : 현 올림퍼스)은 현미경과 광학 기기의 제작을 위해 발족한 회사였으나, 1936년에는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뎃사 구조의 즈이코 75mm/f3.5 렌즈와 105mm/f4.5 렌즈를 발매하였다.

 

올림퍼스와 같은 해에 창업했던 아사히광학(현 펜탁스)은 안경의 렌즈 연마로부터 출발하여 사진 렌즈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35년대가 되면서 뎃사 구조의 렌즈 설계, 제조가 가능하게 되었고, 1937년에는 미놀타플랙스에 쓸 프로마 75mm/f3.5 렌즈를 공급하게 되었다.

 

이 이안(TLR) 사진기는 찍히는 영상에 있어서는 큰 평판을 얻었으나 1937년 미놀타에는 아직 이렇다 할 자사(自社) 브랜드 렌즈가 없었다. 아사히광학에서는 코니카에 옵타 렌즈도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니카와 미놀타는 아사히광학에 있어서 커다란 고객이었다.

 

코니카와 미놀타도 자체 렌즈를 생산할 연구와 시설을 갖추고자 노력을 했으며, 일본 정부에서는 군수 용품을 생산하기 위해 여러 업체에 압력을 넣으며 광학 유리 생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1차 대전이 끝난 뒤에 일본 해군은 광학 유리의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본 해군과 광학 유리

 

오오사카공업기술시험소는 국립 연구 기관으로 1918년에 발족되었다. 공업기술시험소의 「50년사(史)」에 따르면, 광학 유리의 제조 연구는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균질하며 일정한 광학 정수를 가지고 있는 광학 유리는, 원래 19세기 초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제작되었다. 이것이 프랑스로 전수되었으며 19세기 중엽쯤에는 영국으로 전파되었고, 1886년경에 독일에서는 유명한 에나멜 유리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광학 유리 등의 수입이 단절되어 있던 일본 해군은 간신히 프랑스의 파라마운트사로부터 광학 유리 4~5톤을 수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선적하고 일본으로 항해하고 있던 선박이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해군에서는 광학 유리의 자체 제조에 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군은 2년 후에 광학 유리 연구 분야를 담당하고, 실제의 생산은 일본광학(日本光學)에 위탁하여 양산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23년에는 연구 분야도 전부 일본광학에 양도하게 되었다. 일본광학은 회사 설립 다음 해인 1918년부터 광학 유리 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기술적인 난관으로 인해 벽에 부닥쳐있는 상태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8년 직후부터 일본에는 전후 경기(戰後景氣)라는 극심한 경제 불황이 찾아 왔으며, 1919년에는 경제 공항의 파도가 밀려들면서 장기 불황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광학 유리의 자급자족은 국가적인 과제로 생각되고 있는 중요 사항이라서, 1921년 9월부터 일본광학(日本光學)이 본격적으로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광학(日本光學) 역시 대전이 끝난 후 격변의 시대에 여러 가지 고난에 직면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해군으로부터 도저히 이익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서 광학 유리의 연구와 생산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공업기술시험소의 광학 유리

 

1차 세계대전 뒤에 군축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해군 또한 상당한 불만에 빠져있었다. 대함 거포(大艦巨砲)를 신봉하는 해군의 분위기에 서 지금의 레이더에 해당하는 광학 기계는 필수품일 수밖에 없었다. 그 광학 기계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기술의 중심은 ʻ광학 렌즈ʼ이므로 광학 유리가 빠진 일본 해군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대에 있어서 반도체의 역할과도 비슷할 것이다.

 

광학 유리 생산을 위한 상공소 관할의 공업기술시험소는 국가 예산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일본광학은 국책 회사(國策會社)로서 탄생하였다. 관영(官營)만이 아니라 해군에 있어서는 궁극적이고 중요한 광학 유리의 연구 기관으로서 상공소를 포함하여 여러 곳에 국가 예산을 책정하여 해군에 필요한 광학 유리를 조속히 생산하려 했다.

 

동경고등공업(東京高等工業, 현재의 동경공대)의 요업(窯業)과 교수 시바타(芝田理八)는, 1915년 해군이 광학 유리 연구에 착수했던 초기부터 참가했던 전문가였으며 그 후 해군으로 자리를 이동하여 1919년 독일에 파견되었다. 시바타(芝田)는 광학 유리 개막의 시대에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그의 역할은 무척 컸다.

 

시바타는 이러한 환경에서 공업기술시험소를 위해 최초로 리제네레이데이브식 가스용융로를 설계하였다. 더욱이 공업기술시험소에 게 광학 유리의 연구는 설립 당초보다 긴급을 요하는 계획이어서 초대소장 쇼우시(莊司市太郞)는 서둘러 해군에서 근무하는 시바타를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에는 제 3부장 우찌다(內田十喜治)를 담당 주임으로 하여 300Kg급 옹기를 제조하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이것은 국가적인 긴급 과제다!"라는 의식이 넘쳐나고 있었다. 우찌다(內田)이하 5人의 무리 속에는 먼 후일 광학 유리의 권위자 타카마츠(高松)가 포함되어 있었다.

 

타카마츠는 긴 시간 동안의 연구 성과를 10여 년이나 지난 후에 「초자(硝子:유리)의 광학 항수(光學恒數)와 기초 조성 성분(組成成分)과의 관계」라는 대논문으로 종합하여 완성하였다. 그는 ʻ기술적 실적이 없는 연구보고서는 아무리 쓰더라도 공헌이 되지 않는다.ʼ라는 특별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교반(攪拌) 작업의 단계로 옮기려 도가니의 속을 보면, 수 분 전 까지만 해도 있었던 유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거나 마치 빙산과도 같이 둥둥 떠올라 있는 일도 있었다. 즉시 재시험을 하면 새로운 광학 특성을 가진 유리의 조성(組成)은 그것을 녹이는 용기에 있는 옹기를 거침없이 침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가의 원료와 연료는 일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 방면으로만, 긴급한 연구 문제였던 항공기용 점화전(點火栓:점화마개의 개폐장치) 유리의 연구에만 정진을 하고 있던 와타야(綿谷政治郞) 연구원이 그 동안의 연구를 집어치우고 광학 유리용의 내침식성(耐侵食性) 옹기의 연구에 돌입하였다.

 

 

 

유리와 옹기

 

내침식성 옹기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와타야는 그 후 옹기에 있어서 귀신이 되었다. 그는 그 성과를 1928~1934에 걸쳐 보고논문으로 작성하였다. 옹기라 하는 것은 광학 유리의 원료를 집어넣는 초벌구이 도자기이다.

 

초벌구이 도자기는 외관에서는 특이함이 전혀 없으나 고열로 가열시 재료가 용융(熔融)되기 시작하면, 유리 원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온으로 달구어진 유리가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그 항아리 자체를 녹여 버리기 때문이다.

 

타카마츠는 광학 유리 연구 논문에서 이 항아리에 대해 ʻ옹기의 품질 여하는 광학소자에 있어 치명적인 결함을 주며, 광학 유리가 비균질하게 되는 맥리(脈理)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이것이 도자기 소자에 용입(熔入)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이 점이 옹기 제조에 있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옹기를 사용하였었으나, 아무리 고심하여 보아도 스스로 만든 항아리를 쓰지 않고서는 광학 초자(光學硝子) 제조라는 성과를 얻어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ʼ고, 기술하고 있다.

 

맥리(脈理)라 하는 것은 광학 유리가 특정 부분에 있어 균질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맥리(脈理)부분을 빛이 통과하면 빛이 흐트러지면서 결과물에 흐리게 영향을 미친다.

 

와타야의 연구 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옹기는 전체가 이중 구조로 되어 있고, 옹기내면의 3mm 정도의 두께는 내침식(耐侵食)으로 그 바탕이 이루어져 있다. 유리에 직접 닿을 수 없는 본체는 내침식성(耐侵食性)보다도 기계적 강도가 높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콜럼버스의 옹기" 인 셈이다.

 

원인의 발견으로 개발은 획기적으로 진척이 되었지만 그는 원래의 개발 분야로 돌아가지 않았다. 와타야는 소지(素地)의 계발에 몸이 녹초가 되는 것을 잊고 밤과 낮을 혼동하는 날이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고온에서도 견딜 수 있는 내침식성(耐侵食性) 옹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연구에는 그것을 지탱해주는 숨은 공로자가 있기 마련이고 그 만큼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지만, 와타야 등의 재료 기술은 특히나 참으로 값진 일이었다고 일컬어진다. 광학 유리의 용융(溶融)이라는 일도 값진 일이지만 그것을 녹이는 옹기의 연구 역시 값진 일인 것이다.

 

우선 옹기의 제작에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이 옹기를 용광로에서 가열하여 분말원료를 투입하여 교반(橋畔)하면서 1400℃의 고열에서 1~2일 용융(熔融)시킨다. 그리고 각 유리의 특성을 고려하여 온도를 제각기 다르게 하여 신중하게 휘저어 섞어줘야 한다. 용융(溶融)후에는 옹기와 함께 화로 밖으로 끄집어내어 서냉로(徐冷爐:천천히 열을 식혀주는 爐)에 집어넣고 10일간 천천히 냉각시킨다.

 

그리고 옹기와 함께 깨서 유리를 끄집어내어 불량한 부분을 제거하고 사용 가능한 부분만을 덩어리 채로 골라낸다. 그 후 유리를 사각형으로 만든 후 유리의 균질성을 높이기 위하여 400~600℃로 가열한 후 마지막에는 천천히 냉각시킨다. 이 냉각에만도 수개월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유리도 있다. 또한 완성된 유리들도 사용 용도에 맞는 정확한 특성을 지녔는가의 여부는 긴 공정의 마지막에 굴절률과 압배수 등의 수차 허용 안에서 결정된다.

 

굴절률 1.51680이어야할 유리는 적어도 유효 숫자가 소수점 4자리 수치까지는 되어야 한다. 이 수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수 개월간의 노력은 한 순간에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공정은 정밀 요업(精密窯業)에 엄밀 주도(嚴密周到)한 과학적 처리가 추가로 더해져야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전부터 광학 유리의 용융(溶融)은 돈 먹는 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광학 유리의 용융(溶融)은 투명도, 균질도외에 정밀한 연마가 요구되며, 또 광학정수(光學定數)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요구되어진다. 광학 유리의 용융(溶融) 작업은 정밀 정량(精密定量)과 연마의 긴 공정을 필요로 하는 매우 고된 일이었다.

 

 

일본 광학 유리의 은인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가 열린 뒤에 타카마츠의 초인적인 고생을 지탱해준 사람은 쇼우시(莊司) 소장이었다. 쇼우시 소장은 성과가 없다고 질책 당하면서도 매년 요령 있게 예산을 획득해서 과감하게 그의 연구를 도왔던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로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의 광학 유리는 군부나 민간에 제공하여 ʻ광학 유리라고 한다면, 오오사카(大阪) 공업시험소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ʼ라고 일본광학사에 전한다.

 

다카마츠박사는 일본의 "광학 유리의 은인"으로 불렸으며 당시 그쪽 일에 관계되는 관계자 중에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업기술시험소에서는 전쟁 전과 전쟁 후에 걸쳐서 많은 종류의 광학 유리의 용융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다카마츠의 고뇌는 패전 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미군은 진주하면서 예전의 해군 조병창을 시찰하였고, 거기에 과거의 일본 육군의 것과 완전하게 같은 연구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점령군은 이 시설의 폐쇄를 선언하였다. 이러한 일에 다카마츠는 곤혹스러워하였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섭외국(涉外國)과 교섭을 시작했다.

 

연구소는 수주일 간의 폐쇄로부터 해제되었지만, 1948년 1월 다카마츠는 오오사카(大阪) 공업시험소 소장으로 퇴직한 직후에 병으로 타계하였고, 전쟁 후의 일본 사진기 공업의 화려한 융성을 결국 볼 수 없었다. 그가 20년만 더 살았더라면 일본 사진기들이 세계 사진기 시장의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확인하며 감격하였을 거였다.

 

일본이 1970년대에 들어서 세계 사진기 시장을 독점하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코니카의 모리, 일본광학의 쓰나야마, 공업기술시험소의 시바타, 다카마츠, 와타야 같은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구한 결과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군비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될 일이다.

 

오늘날은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겠지만 오로지 ʻ할 수 있다ʼ는 자신감과 ʻ해야 된다ʼ는 사명감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한 일본의 광학 기술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