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9. 20:49ㆍThe 35mm Camera(마루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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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차이스(CarlZeiss)를 만든 사람들
라이츠와 함께 독일 사진기를 대표하는 메이커가 칼 차이스(Carl Zeiss)이다. 아니, 전성기의 칼 차이스는 라이츠를 압도하는 최고의 렌즈메이커였다. 사진기에서도 ʻ콘탁스ʼ 하면 세계 최고의 고급 사진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차 대전 후에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면서 칼 차이스도 둘로 갈라졌고, 그 이후에 급격히 세가 약화되어 오늘날에는 사진기가 아닌 렌즈로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소림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무당파이지만 무당파는 그 출발이 소림사에서 나왔기에 차이스를 무당에 놓을 수가 없어, 곤륜파의 자리에 놓는다. 곤륜파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곤륜산을 터전으로 내공 심법이 유명한 곳이라 차이스의 렌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곤륜파는 태청진기(太淸眞氣), 상청무상신공(上凊無上神功), 양의검법(兩儀劍法), 섬전수(閃電手),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알아주는데, 태청진기(太淸眞氣)와 상청무상신공(上凊無上神功)은 차이스의 뎃사, 플라나, 조나 등의 렌즈와 잘 어울릴 것이다.
1846년에 예나대학의 광학 연구소를 위해 칼 차이스(CarlZeiss, 1816∼1888)가 그의 확대경 공작소를 설립한 곳이 바로 예나이다. 칼 차이스의 허름한 시작은 뒤이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정밀한 광학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칼 차이스는 당시 망원경에 쓰이는 렌즈를 연구하고 있던 프레드릭 쾨너(Frederick Koener)박사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스는 예나대학에서 광학에 관련한 과목을 청강하였는데, 렌즈 제작에 관련된 이론을 여기서 배웠던 것이다. 나중에 차이스는 슈투트가르트, 다름스타드트, 빈, 베를린에 있는 유리, 렌즈 제작자들을 찾아다니는 7년간의 여행을 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며 그는 유리 용해와 성분, 결정 온도 등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차이스의 모든 작업은 철저하게 시행착오를 거친 실증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런 연구 방법은 명백히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차이스는 과학적인 접근이 좀 더 정확하고, 경제적인 생산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차이스는 1866년 예나대학의 강사였던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를 만나게 된다.
에른스트 칼 아베(1840∼1905)는 천재적인 학자였다. 아베는 1866년부터 차이스의 렌즈 연구 작업에 합류하여 보다 품질이 좋은 렌즈를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새로운 종류의 광학 렌즈를 만들기 위한 6년간의 노력 끝에, 아베와 그의 연구진은 1872년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뛰어난 품질의 복합 현미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현미경은 오늘날 쓰이고 있는 모든 복합 현미경의 모태이기도 하다.
복합 현미경이 개발된 1년 뒤인 1873년에 아베는 그의 발명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광학 설계에 있어서 최초로 수차(收差)와 회절 그리고 코마에 대한 연구가 도입되고 설명된 것이다. 칼 차이스는 아베의 노력에 대한 대가로 1876년 아베를 차이스사의 공동 경영자로 임명하였다.
오늘날의 칼 차이스를 있게 한 초창기 세 번째 멤버는 1879년 아베에 의해 칼 차이스로 초대된 프레드릭 오토 쇼트(Freidrick Otto Schott)였다. 쇼트는 광학 유리에 리튬을 사용하는 연구를 진행하였고 그 과정을 설명한 편지를 아베에 보냈는데 아베는 즉시 흥미를 느끼고 쇼트의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그 이후 평생에 걸친 유대를 갖게 되었다.
쇼트는 1884년에 칼 차이스 현미경에 쓰이는 뛰어난 렌즈를 개발하였고, 이로 인해 이 렌즈를 생산하는 공장은 칼 차이스, 에른스트 아베, 프레드릭 오토 쇼트에 의해 공동 명의로 소유가 바뀌었다. 쇼트는 계속해서 100여 개가 넘는 종류의 광학 렌즈를 개발하였고 예나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렌즈 생산지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아베는 논의가 필요 없는 천재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인생 대부분을 광학과 사진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베는 렌즈의 유효 구경이 감소할 때 해상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밝혀냈다. 오늘날 우리는 그 현상이 회절에 의한 것임을 아베에 의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수한 광학 공식과 계측 기술을 합쳐 구면 수차가 없는 렌즈를 만드는 방법을 밝혀내기도 하였고, 또 회절 현상의 일종인 코마에 관한 이론을 밝혀내었다. 오늘날 코마의 보정은 아베의 싸인 법칙의 적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 나아가 아베는 렌즈 설계에 있어서 색수차 보정을 위해 형석(螢石)을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색수차를 없애기 위한 연구의 축적은 아포-크로매틱 렌즈의 개발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베는 오늘날 광량을 계산할 때 쓰이는 노출수치 계산체계를 개발하기도 했다.
1890년에 칼 차이스 재단은 사진기 렌즈를 연구, 개발하기 시작했다. 광학계 수학자였던 폴 루돌프는 칼 차이스 최초의 사진기 렌즈인 프로타(Protar)를 개발했는데, 프로타 렌즈는 비점 수차를 제거하고 시야의 왜곡을 없앤 렌즈였다.
차이스, 차이스 이콘으로 거듭나다
1896년에 루돌프는 오늘날까지도 그 섬뜩한 정확도로 유명한, 전설적인 플라나(Planar) 렌즈를 개발한다. 플라나 렌즈는 콘탁스 SLR 사진기, G시리즈 사진기, 핫셀블러드 사진기 등에 쓰이고 있다. 플라나 렌즈는 광학 대칭 설정을 통해 구면 수차와 비점 수차를 완벽히 제거했다. 플라나 렌즈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있는 렌즈 공법 중의 하나이다.
세기가 바뀐 1901년에, 세계는 칼 차이스 제단의 로(M. Von Rohr)가 개발한 최초의 비구면 렌즈를 경험하였다. 이어서, 칼 차이스 뎃사(Tessa) 렌즈가 1902년에 루돌프 계산법의 적용으로 태어나게 된다. ʻ독수리의 눈ʼ으로 알려져 있는 뎃사 렌즈는 높은 해상력과 콘트라스트로 유명하였다. 뎃사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숫자 4를 의미하며, 이 렌즈는 비교적 단순한 네 개의 유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뎃사 렌즈가 갖고 있는 설계의 단순함, 높은 콘트라스트, 그리고 아주 적은 왜곡에 대한 명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패하게 되고, 연합국에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이로 인해 독일 경제는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고, 끝없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대기업들은 차례로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사진기메이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어, 예나에 본사를 둔 최대 렌즈메이커인 칼 차이스 재단은 큰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진기메이커들이 도산을 하게 되면 차이스 회사의 간판 생산품인 고급 뎃사 렌즈의 판매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차이스는 자구책으로 드레스덴에 있는 에르네만(Heinrich Ernemann AG Dresden)과 ICA(Ica AG. Dresden), 베를린의 CP(Optische Anstalt C.P Goerz AG. Berlin), 슈트가르트의 콘뎃사-넷텔(Contessa-Nettel AG. Stuttgart) 등 네 개의 기업을 설득하여 새로운 차이스 이콘(Zeiss Ikon)을 탄생시키고 그 본사를 드레스덴에 두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차이스는 칼 차이스를 뜻하고 이콘은 네 기업의 이니셜 등을 합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합병한 네 기업은 모두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과거 몇 차례의 흡수 합병을 거듭해서 대형화된 대기업들이었다. 합병 후의 차이스 이콘은 1929년 이콘타(Ikonta), 1932년 콘탁스(Contax), 1934년 수퍼 이콘타(Super Ikonta)와 이코플렉스(Ikoflex) 등 여러 가지의 신형 사진기들을 생산해 나갔다. 이 시대의 차이스 이콘은 최고의 설계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가진 세계 최대의 사진기메이커로, 칼 차이스의 우수한 렌즈의 뒷받침에 힘입어 고급 사진기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차이스 이콘은 사진기와 렌즈의 해외 수출을 통해 전후 독일 경제 부흥과 재건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1925년에 라이츠사에서 35mm 사진기 ‘라이카’를 소개하면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혁신적이고 작은 기기는 큰 인기를 얻어 당시에 놀랄만한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차이스 이콘은 많은 종류의 사진기를 생산하였으나 초창기에는 라이카의 적수가 되지 못 하였다.
차이스 이콘의 콘탁스
1932년에 드디어 차이스 이콘은 라이츠의 라이카와 견줄만한 콘탁스(Contax) 사진기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라이츠사는 오직 한 종류의 사진기(라이카)만을 생산했으나, 차이스 이콘은 여러 가지 제품들을 만들어 내어놓았는데 그 많은 제품들의 정점(頂點)이 바로 콘탁스였던 것이다. 최초의 콘탁스는 오늘날 최고 수준의 레인지파인더 사진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최초의 콘탁스는 셔터 스피드를 라이카보다 더 빠른 1/1,000초까지 조절할 수 있는 11개 날로 구성된 수직 포컬플레인 셔터를 갖고 있었다.
콘탁스 Ⅱ는 예나에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되었다. 콘탁스 Ⅱ는 1/1,250초까지 셔터 스피드를 지원하였고 셀프타이머와 크롬도금 바디를 갖고 있었다. 콘탁스 Ⅱ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 콘탁스 Ⅲ는 1936년에 함께 출시되었으며 사진기 상단부에 노출계를 내장하고 있었다.
1936년에서 37년경에 칼 차이스의 엔지니어는 새로운 종류의 사진기를 연구하였다. 그것은 콘탁스 Ⅱ에 기반을 두고 거울을 삽입한 일안 반사 형식의 35mm 사진기였다. 처음의 설계에 따른 뷰파인더에 투영되는 이미지는 너무 어두웠다. 이후 시도 보정 렌즈와 펜타프리즘이 삽입되었고 포커스 링을 통해 초점을 맞추는 형태가 도입되었다.
불행하게도 콘탁스 SLR 사진기의 초기 원형(原型)들은 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고 없다. 1945년 2월 14일 연합국의 폭격이 드레스덴에 있는 사진기 공장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이 폭격은 칼 차이스재단의 역사에서 어려운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패튼(Patton)의 전차 군단이 예나와 칼 차이스재단을 접수했다. 이때까지 예나공장은 보전되고 있었으나 얄타회담 이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예나와 드레스덴의 공장은 칼 차이스재단의 대부분과 함께 동독으로 귀속돼 버렸다.
분단이 결정된 직후 미군들은 서독으로 복귀하면서 칼 차이스의 기술적인 중요성을 확인하고 126명의 핵심적인 기술자들과 운영진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이들은 서독 슈투트가르트의 콘뎃사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슈투트가르트공장은 전쟁 전부터 이콘타와 수퍼 이콘타를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우선 그 생산을 재개하고 이코플렉스의 생산도 곧 이어서 부활시켰다. 1950년에는 콘탁스 Ⅱa, Contax Ⅲa와 콘뎃사 35가 발매되었고 1953년에는 콘타플렉스도 발매를 하게 되었다.
드레스덴과 예나에서 소련에 의해 벌어진 약탈에도 불구하고 전후(戰後) 동독의 칼 차이스는 부활하였다. ʻ칼 차이스 예나ʼ라고 불리어진 일련의 사진기들을 생산하였고 이 사진기들은 전쟁 배상금으로 소련에 의해 약탈당했다. 또 다른 칼 차이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동독과 서독의 칼 차이스는 서로 다른 전략을 취했다. 서쪽의 칼 차이스가 과거의 RF 사진기들을 현대화시키는 데 주력한 반면, 동쪽의 칼 차이스는 SLR 사진기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진기를 개발하는 데 노력했다.
1949년에 라이프찌히 포토키나에서 동독의 칼 차이스 드레스덴은 콘탁스 S라고 불린 펜타프리즘을 내장한 세계 최초의 35mm SLR 사진기를 출시했다. 콘탁스 S는 전쟁 이전의 콘탁스 SLR 사진기의 원형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것은 42mm 스크루 마운트를 통해 렌즈를 교환할 수도 있었다. 콘탁스 S는 금속 셔터가 아닌 세로로 작동하는 천으로 만든 셔터를 채택했다는 점과 전체적인 사이즈가 줄었다는 점에서 다른 대개의 콘탁스 사진기와 달랐다.
1952년에는 S의 후속 기종으로 콘탁스 D가 출시됐다. D는 드레스덴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쪽의 칼 차이스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S와 D의 차이점은 플래시 접점이 사진기 상단으로 이동했다는 것과, 시끄러운 작동 소리가 작아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차이는 거의 없었다. 이후, 동독 칼 차이스의 사진기는 펜타프리즘을 단 콘탁스라는 뜻의 펜타콘(PENTACON)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서독의 칼 차이스에서는 1950년 포토키나에서 콘탁스 Ⅱa를 내놓았고 1년 뒤 Ⅱa를 위한 16종류의 렌즈들을 출시했다.
당시 출시된 렌즈들은 : Biogon 21mm/f4.5, Biotar 75mm/fl.5, Topogon 25mm/f4.0, Sonnar 85mm/f2.0, Biogon 35mm/f2.8, Triotar 85mm/f4.0, Biometar 35mm/f2.8, Tessar 115mm/f3.5, Planar 35mm/f3.5, Sonnar 135mm/f4.0, Sonnar 50mm/fl.5, Sonnar 180mm/f2.8, Sonnar 50mm/f2.0, Sonnar 300mm/f4.0, Tessar 50mm/f3.5, 500mm/f8.0. 등 이다.
1951년에는 콘탁스 Ⅲ를 계승한 콘탁스 Ⅲa가 출시되었다. Ⅱ와 Ⅲ의 차이처럼 Ⅲa는 노출계를 내장했으며 이 내장된 노출계는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고 넓은 범위의 측광이 가능하였다.
이후 서쪽의 칼 차이스는 1955년 매우 높은 성능의 SLR 사진기이자 한편으로는 뛰어난 모습으로 이름 높았던 콘타렉스(Contarex)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사진기는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만든 훨씬 값싼 니콘(Nikon) F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966년에 콘탁렉스 프로페셔널이 소개되었다. 이 사진기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 노출계가 내장되어 있지 않았다. 가격은 내려갔지만 편의성에서 니콘에 밀린 콘타렉스는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했으며, 1967년에 내어놓은 콘탁렉스 슈퍼에는 다시 노출계를 내장했으나 역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차이스 이콘에서 만든 마지막 SLR 사진기는 콘타렉스 SE이다. SE는 수퍼 일렉트로닉(Super Electronic)을 의미한다. SE의 색다른 특징 하나는 세계 최초로 조리개 우선 방식의 촬영을 가능케 하는 망원 센서(Tele Sensor)였다.
차이스의 황혼, 야시카와의 합병
전쟁 전의 명성을 되찾고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웠던 차이스 이콘이었지만 사실은 이 무렵부터 병폐가 내부에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단 차이스 이콘뿐만 아니라 서독의 사진기 산업 전반에 걸쳐서 번지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과언은 아니었다. 그 당시 독일이 개척해 놓았던 기반을 등에 업고 일본제 사진기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쟁 중에 독일에서 배운 기술 그대로 사진기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점차로 일본인 특유의 연구 성과에 힘입어 급속하게 품질을 향상시켰고, 1963년에는 탑콘 리 슈퍼(Topcon Re Super)를 선두로 눈으로 보이는 기술 혁신에 의해서 세계 사진기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서독의 사진기산업은 스스로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일본의 근접을 예측하지 못하였고, 시간이 흐른 후 일본에게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잠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2차 대전의 패배로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면서 광학 공장도 양분되었고, 많은 생산 라인이 소련으로 옮겨진 이유도 크다. 사회주의 국가 체제를 가진 동독에서 생산된 사진기와 렌즈들은 서독에서 나오는 것들과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조잡해졌고, 시장에서 팔리지도 않았다.
독일제 콘탁스 사진기는 정교한 기술과 혁신적인 디자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더 이상 콘탁스 사진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일본의 저가 공세로 인해 독일 사진기 산업은 절대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칼 차이스 재단이 찾은 해법은 야시카와의 합작이었다. 야시카의 전자 사진기 기술에 매력을 느낀 차이스가 콘탁스 사진기를 일본에서 생산토록하고 그 사진기를 위한 렌즈들은 칼 차이스 이콘에서 생산한 것이다. 이런 형식의 합작은 후일 다른 독일 사진기 메이커들에서도 사용되었다.
계약이 성립된 직후 칼 차이스와 야시카의 합작에 세 번째 파트너가 참여했는데, 이는 디자인을 담당한 포르쉐그룹이었다. 칼 차이스의 광학 기술과 야시카의 전자 설계 기술, 그리고 포르쉐의 인체 공학적 디자인이 결합된 것이다. 이들의 첫 번째 결과물은 1974년 포토키나에 등장한 콘탁스 RTS로 불린 제품이었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일본에서 생산된 콘탁스는 무늬만 콘탁스라고 본다. 라이카도 캐나다와 포르투갈에 공장을 세우고 거기서 일부 제품을 생산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라이카의 공장이고, 일본의 야시카에서 만드는 콘탁스는 일종의 라이센스 생산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칼 차이스 렌즈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것은 독일에서 만든 칼 차이스 렌즈가 그렇다는 것이지 일본 제품인 칼 차이스는 진정한 차이스라고 하기 어렵지 않은가?
독일의 유명한 렌즈 중에서 이름이 높던 포익틀랜더의 렌즈도 일본의 코시나에서 라이센스로 생산을 하지만 그 렌즈를 누구도 포익틀랜더의 렌즈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포익틀랜더의 아포 란타 렌즈는 지금도 엄청난 고가에 거래가 되지만 코시나에서 만든 아포 란타 렌즈는 일본 유명 렌즈보다도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일본에서 나온 차이스 렌즈도 뛰어난 색감과 콘트라스트를 보여준다고 하는데 어떤 전문가가 쓴 기사를 읽고는 정이 가지 않았다. 작은 사진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크게 확대하면 색 재현력이 눈에 뛰게 떨어진다는 평을 보았던 것이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다시 독일의 광학산업은 활기를 띠고 있지만 그렇다고 일본에 넘겨진 사진기시장의 왕좌를 다시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 차이스가 차이스 예나와 분리되면서 사진기 시장을 내어주었지만 차이스의 렌즈들은 오늘날에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므로 차이스는 그것으로 만족해야할 것이다.
차이스가 옛 명성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제품을 다시 독일에서 생산하는 체제로 가야하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지는 의문이다. 차이스가 세계 최고의 렌즈라는 이름을 스스로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Classic camera s price guide 2000 Zeiss Ikon 특집"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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