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31. 08:04ㆍ시우의 여행기
이스탄불이 터키의 역사적 수도라고 한다면 앙카라는 터키민주공화국의 현재 수도입니다.
앙카라는 이름이 앙골라에서 왔다고 하는데 그게 앙골라 양인지, 아니면 제가 어려서 보았던 앙골라 토끼인지는 확인하지 못해씁니다.
1923년에 터키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이전했는데 이스탄불이 이미 포화상태애서 더 이상 개발이 어렵고 지하에 유적이 너무 많아서 땅을 팔 수가 없어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앙카라는 크게 자랑할만한 게 없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이스탄불이 터키의 외곽에 있다면 앙카라는 안쪽 깊숙히 들어와 있어 이곳을 거쳐야 다른 곳으로 가기가 편리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동하는 경유지가 되었습니다.
사프란불루를 다섯 시 반에 출발하여 저녁 일곱 시 40분 경에 앙카라 로얄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머문 곳이 중심지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대통령이 지나간다고 경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다만 호텔이 말로만 로얄이어서 많이 비좁아 모여서 술을 마실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시장해서 저녁 뷔페에 갔지만 오늘은 앙카라 시내에 나가서 한 잔 할 거라는 말에 우리 팀들은 조금 부실하게 먹었을 겁니다.
그래서 앙카라 시내를 나가봤는데 일요일 저녁이라 다들 문을 닫아 여기 저기 헤매다가 치킨이 아닌 백숙 비슷한 닭을 파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시킨 건 닭이었지만 여기도 빵과 밥이 함게 나옵니다. 그리고 술은 옆의 가게에서 사다가 주는데 에페소 맥주였습니다. 닭 한 마리가 9리라 라고 하는데 1리라가 우리 돈으로 500원이었으니 닭이 4500원이면 비싼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치친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숙도 아니어서 조금 아쉬운 점은 있었습니다.
열 시 반에 자리를 파하고 들어와 열한 시 반 정도가 되어 코를 곯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앙카라의 한국공원 모습입니다. 한국인들이 앙카라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라고 합니다.
앙카라를 거치면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꼭 거치면서 참배를 하는 곳이 앙카라 한국공원입니다.
여기는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가 희생당한 터키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곳입니다. 사실 1950년에 대한민국은 터키 사람들에게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를 때였을 건데 이역만리 낯 선 땅에 파병이 되어 희생이 되신 분들이라 고개가 숙여집니다.
앙카라에서 새벽 밥을 먹고 출발하여 카파도키아로 갑니다.
가는 도중에 소금호수를 거치는데 겨울에는 그냥 호수입니다. 그런데 이 호수의 물이 봄부터 층발하기 시작하여 소금사막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소금이 터키 전 지역에서 쓸 수 있는 양이 된다고 하니 놀라운데 그냥 깨내기만 하면 된답니다. 겨울은 그냥 물인데 맛을 보니 짠맛이 분명합니다.
토즈가 소금이고 굴라가 호수인 거 같습니다. 여름에 오면 장관이라는데 겨울에는 그냥 짠맛이 나는 호수일 뿐입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예전의 소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오늘날 터키의 카파도캬(Kapadokya)에 해당되는 지역인데 터키 여행의 한 축입니다. 아나톨리아 고원 한가운데에 자리한 카파도키아는 실크 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으로 대상 행렬이 근대까지 이어졌으며, 에니메이션 '스머프'의 영감이 되었고, 미국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자 수세기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켜온 이들이 살아온 역사의 땅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과거 히타이트부터 시작해 페르시아, 로마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흥망성쇠를 거듭하여도 꾸준히 사람이 살아왔었고,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지점 중 하나로서 대상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지역의 주요 관심사인 동굴에 관한 것은 비잔틴 사람들이 아랍의 심한 간섭과 박해를 받게 되자 9세기경에 일부가 이곳으로 도망쳐와 굴을 파고 숨어 살게 되었던 것이 기원이라 하는데 '카파도키아'라는 말의 어원은 '말을 바꾸는 곳'에서 온 거라고 최해성 가이드가 전합니다. 여기서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은 낙타로 바꿔 타고 낙타를 타고 온 사람들은 말로 바꿔탔다는 겁니다.
카파도키아는 이름이 난 유적이 무척 많은 곳입니다.
데린구유, 괴레메, 우치하사르, 데브렌트 계곡, 흐흘랄라 협곡, 파사바흐 계곡, 셀레메 수도원 등이 그것인데 이런 유적은 한마디로 하면 지형이 특이해서 생긴 것입니다.
아래 사진들은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인 데린구유의 모습입니다. 제 사진기는 어둔 데서 찍기가 힘들어 다른 분의 사진을 넣었습니다.
위에 보이는 동굴도시가 데린구유입니다.
1968년에 발견이 되엇다고 하는데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까닭 모르게 실종이 되어 닭을 찾던 농부가 지하에서 들려오는 닭울음 소리에 놀라서 찾아보니 지하에 수천 명이(수만 명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살았던 마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시안의 진시황의 병마용이 우물을 파던 농부가 발견해서 세상에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여기도 데린구유가 '깊은 우뮬'이라는 뜻이어서 그런 말이 있던데 그건 사실이 아니고 닭을 찾다가 찾았다고 합니다. 약 230년 동안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살았다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지만 저는 조금 들어갔더니 폐쇄공포증인지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나왔습니다.
카파도키아는 대규모 기암 지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불가사의한 바위들이 많다. 적갈색, 흰색,주황색의 지층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이것은 수 억 년 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화산재와 용암이 수백 미터 높이로 쌓이고 굳어져 응회암과 용암층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카파도키아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로부터 도망쳐 온 기독교도의 삶의 터전으로 시작됐으나 7세기 중반 이슬람 왕조의 침공을 받게 되자 신자들은 동굴이나 바위에 구멍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제가 찍은 게 아닙니다. 열기구를 타고서 공중에서 내려다 보고 찍은 모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이나 지질 구조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도 굳이 땅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보는 사람들이야 신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려서 집 부근의 동산에 굴을 파고 논 적이 있는데 흙이 바쳐주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사토가 잘 무너지지 않습니다. 카파도키아에 굴이 많은 건 지형이 그렇게 굴을 파고 살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힘도 크게 작용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저렇게 무너지지 않는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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