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5. 18:05ㆍ시우의 여행기
20. 02. 16. 일. 맑음.
포르토르즈, 피란, 로빈, 폴라, 쟈그레브 외곽 도착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이 아드리아해 바닷가에 있었다. 호텔 뒤 쪽에 산이 있고 앞에는 큰 나무들이 있는 해변이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새소리들이 아주 좋았다. 다섯 시에 일어나서 씻고 기도하고 사진기 들고 나갔다. 여섯 시에 아침밥을 먹는다고 했는데 다섯 시 40분쯤 나가서 호텔 주변을 돌았는데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오다가 보니 '비치'라는 표지판이 보여 그리로 갔다. 바다가 무척 맑고 잔잔해서 바다 속이 다 보였다. 이쪽 바다는 바다 비린내가 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바다 속에 작은 물고기들이 움직이는데 주변에 고기 잡는 배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섯 시부터 아침밥을 먹는다고 해서 들어가서 아침을 맛있게 잘 먹고서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용주 선생, 치훈 선생, 희정 선생, 소영 선생 등이 나와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빛이 조금 나와서 사진을 찍을만했다.
일곱 시 반에 다시 호텔로 들어가서 짐을 챙겨 나와 08시에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08시 30분에 피란에 도착했다. 피란은 '작은 베니치아'라고 한다는데 작은 마을로 보였다. 타르티니광장과 성조지 성당을 둘러보았는데 그 성당은 언덕 위에 있었다. 종탑(시계탑)에 올라가면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탑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성당에는 미사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보낸 뒤에 아홉 시 40분에 다시 출발해서 로빈으로 갔는데 10시 10분에 도착했다.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길은 다소 절차가 복잡하다. 크로아티아가 EU국가이기는 하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쉔칸 조약의 체결국이 아니어서 별도의 검문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슬로베니아 국경을 넘어서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어오는 데에 두 번의 검문소를 거쳤다. 먼저 슬로베니아 국경검문소에서 여권에 출국도장을 받고 이어서 크로아티아 검문소에서 입국도장을 받은 것이다.
로빈은 아름다운 경관으로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라고 들었지만 가서 보니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이스트라반도의 '두브로브닉'이라는 이름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트라 반도에 있는 로빈은 많은 유럽인이 사랑하는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아드리아 해를 향해 달걀모양으로 길게 뻗어 나온 로빈은 '로비니'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로마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전성기를 누리던 1283년부터 1797년까지 500여 년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베네치아 지배 시기인 1763년에 섬과 육지를 흐르던 해수로를 매립하여 반도 같은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로빈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다가 감싸고 있고 주홍빛 지붕의 집들과 마을 중심 언덕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성 유페미아 성당, 그리고 항구에 정박한 요트들이 멋진 작품 사진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했다. 특히 산처럼 봉긋이 솟은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터를 잡은 성 유페미아 성당은 1736년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된 것으로 로빈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라고 했다. 원래는 성 조지 성당으로 불렸는데 성 유페미아 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성 유페미아는 서기 304년 로마 디오클라티아누스 황제의 천주교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15세의 나이로 병사들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고 결국 사자에게 던져져 순교했다
그녀의 유해는 고향 칼케튼 사람들이 수습하였고 620년 페르시아군이 쳐들어 왔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럼에 있는 교회로 유골함이 옮겨졌으며 800년 성상파괴운동이 극심해졌을 때 그녀의 유골함을 치우라는 압박을 받았다. 그 때 버려진 성 유페미아의 대리석 유골함이 바다에 떠서 로비니 하안까지 왔는데 두 마리의 작은 소를 끌던 소년이 유골함을 언덕위로 끌어 올렸고 로비니 사람들이 이를 기적이라고 여겨 성 유페미아를 마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성 조지 성당을 성 유페미아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나는 작은 골목을 따라 성 유페미아 성당 앞 까지 갔다가 내려왔는데 높은 언덕을 따라 작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집들 사이로 작은 골목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작은 집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상점이거나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개조된 것 같았다. 신소영 선생과 같이 걸으면서 사진을 몇 컷 찍고 내려왔다.
다른 곳도 그렇겠지만 여기의 옛 도심은 바닥이 대리석으로 깔려 있고 그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고 빛을 반사한다는 것이다. 매년 보도 불럭을 교체한다고 도로를 파헤치는 서울을 생각하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곳으로 갔던 사람들도 다 광장으로 모였는데 여기는 광장 끝이 바로 바다였다. 그리고 광장에는 꽤 넓은 노천카페가 여러 곳에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아침부터 카페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환담하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다 일하러 갔을 것인데 일이 없는 것인지 여유가 많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눈길을 끈 것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 많았다는 거다. 나는 어느 지역에 가든 어린 아이가 많은 것이 무척 부럽다. 어린 아이가 많다는 것은 앞으로 발전 가능이 무한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시골에 가면 어르신만 보이고 아이들은 정말 하나도 없어 걱정이라 다른 나라에서 아이가 많은 것을 보면 언제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팀들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는데 나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쪽의 커피들은 양을 너무 많이 주고 진해서 내 입에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여행을 다녀오고 한참이 지난 10월 말에 EBS의 세계태마기행 ‘유럽의 골목길-인생은 축제다’에서 로빈이 나왔는데 우리가 갔던 곳이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거기에 나와서 놀랐다. 우리는 겨우 몇 시간의 시간으로 로빈을 보았지만 이 프로에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촬영했으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다음에 가면 다시 제대로 보고 올 생각이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폴라로 갔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갔는데 폴라의 자랑은 아스타라반도 최대의 로마유적지라고 했다. 지금도 원형이 대체로 남아 있는 폴라아레나 원형극장이 가장 유명한 유적이었다. 콜롯세움보다는 많이 작지만 그와 아주 유사한 형태라고 했다.
이 원형극장은 폴라에 있는 고대 로마 건축물로 가장 유명하며, 1세기 원형 경기장으로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로마경기장이라고 했다. 입장료가 40쿠나인데 약 5유로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만 보았다. 이것은 가장 잘 보존된 고대 원형극장중 하나이며 각종 공연이나 여름영화제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파시스트들이 이 경기장을 분해하여 이탈리아로 이동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운송비용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눈으로 봐서는 그게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지만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월드컵 경기장이나 잠실 운동장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니 안에 있는 사람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밖의 모습만 남아 있고 안에는 다 훼손이 된 상태였고 여기 저기 복원하는 것인지 공사의 흔적이 보였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유럽의 대부분은 화장실이 문제인 것 같다. 공중 화장실은 거의 없고 유적지 부근에도 화장실이 없어 음식점이나 카페에 들어가 음료라도 시킨 뒤에 화장실을 이용해야했다. 그러니 유적지에 가면 혹 화장실이 있을까 하고 참았던 사람들은 거기에도 화장실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허탈해진다는 것이다.
원형극장을 둘러 본 뒤에 한 바퀴 돌면서 유적을 돌아봤는데 시르게우스 개선문, 아우구스트 신전을 보고는 바닷가에서 파스타로 점심을 먹었다. 이 동네도 이탈리아가 가까워서인지 주 음식이 파스타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 엘비스 주의 말대로 하자면 크로아티아는 어디나 다 음식이 맛이 없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입에는 다 괜찮았다. 내 입맛이 글로벌타입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맛을 모르는 시골타입이라 그런지는 나도 확인이 되지 않지만 내게는 먹을 만했다.
열두 시 오십분에 점심을 먹고서 13시 40분에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15시에 휴게소에 들렀다가 20분 정도 쉬고 다시 출발해서 18시에 자그레브 외곽에 있는 프린세스호텔에 도착했다. 말이 자그레브 외곽이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도로가에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여섯 시 반에 저녁 식사를 했는데 오늘 저녁은 생선커틀릿이었다. 내가 먹은 것은 굴비 짝퉁인 것 같은 우리나라 백조기 맛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생선 종류가 다 달랐다고 한다. 내가 두 자매와 어머니하고 같이 앉아 먹었는데 그 어머니께서 자기 생선을 다 내게 덜어주어 나는 너무 많이 먹었다. 한쪽만 더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두 쪽을 다 주는 바람에 과식한 것이다. 나는 늘 사양지심이 부족해서 문제이다. 그냥 적당히 사양했으면 좋았을 것을 다른 사람이 생각해서 덜어준다고 그것을 다 먹느라 애를 먹었으니 이게 마음이 따뜻한 것인지 좀 모자라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도 여덟 시에 모여서 아홉 시까지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잤다. 이젠 소주가 다 동나서 와인만 마시게 되었다. 나는 집에서는 와인을 마신 기억이 거의 없을 만큼 와인을 마시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에선 그동안 살아오면서 마셨던 와인의 총량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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