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클럽의 사랑방, 드림호프 4,680마리의 통닭

2021. 7. 18. 11:15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나는 무엇을 구입할 때나 술을 마실 때 한 번 정해 놓은 집만 다닌다. 그렇게 믿고 다니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한 번 마음을 주면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술집도 늘 같은 집만 다닌다. 어떤 집을 단골로 정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일 것이다.

 

남자들이 첫 번째로 선호하는 이유는 술집 아줌마가 예쁘냐?”라는 것일 게다. 누가 뭐라 해도 이쁜 아줌마가 있는 집이 우선이다. 그다음은 그 아줌마가 친절하냐?’가 선택의 이유가 될 것이고 세 번째는 음식 맛이라고 생각한다. 더러 아줌마가 이쁜 것과 술맛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다 개개인의 취향이니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또 이쁜 것의 기준도 다 달라서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눈이 삐었다는 핀잔을 하지만 그거 역시 취향의 문제라고 본다.

 

나는 근래에 통풍으로 인해 통닭과 맥주를 멀리하지만, 한때 종로에 나가 한 집에서만 4,680마리의 통닭을 먹었다. 이 숫자가 정확하냐고 따지면 그렇다고 우기기는 싫지만, 그보다 더 먹었으면 더 먹었지 적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내가 진미통닭에서 드림호프까지 세 번 이사하는 동안에 드나든 시간이 15년이다. 1991년 후반기부터 시작하여 2006년까지 다녔다. 이 기간에 한 주에 두 번씩 갔다고 계산하면 1년에 104번이 된다. 10415로 곱하면 1560번이 된다. 솔직히는 여기에 800번을 더 더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다. 1560번을 다니면서 갈 때마다 한 번에 세 마리씩 계산을 하면 4,680마리가 되지 않는가? 어림잡아 5,000마리로 해도 틀리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혼자서 먹은 것은 아니다. 내가 시킨 닭의 숫자가 이만큼이다.

 

종로에 나가서 술을 마시게 된 것은 순전히 가보카메라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가보카메라에 들렀다가 집으로 왔고 가보카메라에 들른 날은 거의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주로 세운상가 부근의 동원이라는 삼겹살집에 다녔는데 내가 진미통닭을 다니게 된 뒤부터는 1차가 아니면 2차에 진미통닭을 꼭 거치게 되었다. 뒤에 이름이 드림호프로 바뀌긴 했지만 그렇게 15년을 다녔다.

 

처음에는 진미통닭이었다. 내가 어떻게 처음 거기에 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일하는 아가씨가 무척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주인아줌마하고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주모처럼 이것저것을 다 알아서 하는 조금 나이 든 아가씨가 잘해 주어 자주 다녔다. 처음에 나와 같이 진미통닭을 드나든 사람은 주로 우리 제자들이었다. 학교에 합격하거나 떨어진 제자들을 축하하거나 위로하러 다녔는데 진미통닭의 닭이 전기구이여서 담백하고 다른 집보다 양이 푸짐해 보여 자주 다닌 거였다.

 

나는 깔끔을 떠는 편이 아니고 어느 거나 다 무던한 편이지만, 진미통닭은 1층은 비좁고 2층은 바퀴벌레가 자주 나와 아이들이 기겁하곤 했다. 그래도 닭이 맛있다는 것으로 다 용서될 수 있었다. 나는 많을 때는 열 명 이상도 가고 적을 때는 두세 명도 데리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닭을 먹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층으로 줄어들고 내가 좋아하는 아가씨가 결혼했다고 사라진 뒤에는 조금 덜 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한 번은 외상을 달라고 했더니 주인아줌마가 눈살을 찌푸려서 머쓱해진 적이 있다. 충분히 외상을 먹어도 될 만큼 다녔는데도 딱 한 번 요청에 난색을 표명하다니……. 내 표정이 별로 안 좋게 변했는지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지만, 먹고 나서 보니 그날 먹은 것은 외상으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있어 갚고 나왔다. 어찌 되었든 그날 주인아줌마의 차가운 인상은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뒤에 어느 날 가서 보니 문을 닫고 다른 업종이 들어와 있어서 놀랐다. 그래도 믿고 다닌 집이 없어졌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나와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은 전부 진미를 한 번은 거쳐 갔고 이제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없어져서 허전했다. 그렇다고 없어진 집을 어디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진미통닭을 다시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였다. 다른 집에서 술을 마시고 지나가다가 맥주 한 잔을 더 하자는 말에 그냥 불쑥 들어갔더니 차가운 아줌마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 내가 이사를 가려면 알려주고 가야지 단골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했더니 그러잖아도 정말 미안했다면서 갑자기 이사하게 되어 연락 못 했다고 상냥하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로 지난날의 그 차가운 인상을 다 잊기로 했다.

 

그로부터 종로에 나가면 늘 찾게 되는 곳이 진미통닭이 되었다. 내가 데려갔던 제자들이 자기 친구와 함께 찾아오고 사진클럽 행사가 있어서 모이면 내가 늘 그곳으로 안내해서 다들 거기서 먹고 마셨다. 우리가 단골이 되면서 서비스가 달라졌는데 통닭집에서 꼭 김치를 내주고 닭을 서너 마리 먹으면 오징어나 마른안주 한 접시가 따라 나왔다. 그러니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자리를 다시 근처로 옮기며 이름이 드림호프로 바뀌었다.

 

나는 드림호프로 바뀔 적에 이선희 콘서트 때 가서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한쪽에 걸어 놓았다. 거기는 별실로 보통 열다섯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었는데 늘 우리가 차지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선희 골든디스크를 사다 주고서 내가 드림에 갈 때마다 이선희 노래를 틀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학교에 온 신임 교사들 환영연을 몇 년간 드림호프에서 했다. 우리가 많을 때는 30명 가까이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 나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웠지만, 드림에 가면 대략 30만 원 정도에서 해결해 주었다. 많은 숫자가 가서 먹으니까 서비스도 더 많이 주고 해서 내 부담을 덜어 준 거였다.

 

15년을 다니다 보니 주인아줌마는 내게 친누님처럼 대해 줬다. 명절 때만 되면 여러 선물에, 때때에 맛있는 김치를 담가서 주곤 했다.

 

우리 집사람도 가끔은 가서 같이 인사하고 먹고 왔다. 거기서 만나서 먹고 마신 사람들이 내게 언제나 힘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닭 한 마리와 맥주 3,000정도는 가볍게 먹어치웠고 기분이 날 때는 5,000도 즐겨 마셨다. 내 생각에 내가 드림호프의 최고 단골이 아닐까 싶었다. 드림에서 일하는 아줌마나 아가씨도 내가 가면 언제나 반가워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알바를 하기도 했고 연변 아줌마도 둘이나 왔다 갔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서울포토클럽 회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 클럽이 쇠잔해지고 나도 술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던 때에 내게 통풍이 찾아왔다. 통풍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술을 안 마시고 고기를 안 먹어야 한다는데, 특히 맥주와 통닭을 멀리하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드림호프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1년 뜸했더니 어느 날 아줌마는 떠나고 드림호프는 주마루로 변해 있었다.

 

내가 즐겨 쓰던 호가 마루여서 가까운 사람들은 그 주마루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줄로 생각들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이름이고 새로 시작한 주인과는 아주 모르는 사이였다. 드림호프도 다니는 것을 멀리했는데 내가 어떻게 주인이 바뀐 곳에 다니겠는가.

 

나는 종로와 멀어졌고 통닭도 맥주도 돌을 보는 것처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통닭과 맥주와 드림호프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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