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다시 만나든

2021. 7. 18. 11:19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서울클럽에 와서 만난 친구 중 가장 오래된 사람이 동근이다. 동근이는 나보다 두세 달 먼저 가입해서 오랜 시간을 같이 어울렸고 사진 찍는 만큼이나 술자리도 같이 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동근이는 나보다 사진에 훨씬 가깝고 그것이 그의 직업과 연관되어 있어서 취미로 사진을 찍는 나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서로가 통하기 때문에 격의 없는 사이 정도가 아니라 속을 다 터놓고 쓴 소리도 마음대로 해댈 수 있는 정말 가까운 친구이다. 사회에서 사진으로 만난 친구지만 오랜 세월 격의 없이 지내다 보니 고향 친구처럼 되어버렸다. 동근이는 지금 천안에 내려가 있어서 생활귄이 천안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서울클럽의 일이 있으면 언제나 함께 하는 믿음직한 친구이다.

 

창복이는 서울클럽에서 10년을 넘게 만났지만 나와 술자리를 같이하기는 3번밖에 안 되는 특별한 관계였다. 나를 안다고 하면 술을 빼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운 일이나, 창복이는 술과 거리가 멀어서 술 밖의 친구가 된 거였다. 나보다 조금 늦게 우리 서울클럽에 들어와 클럽의 재무를 10년 가까이 보다가 지금은 소식이 끊기었지만 서울클럽을 생각하면 언제나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우리 월간사진 서울지부에 내부 균열이 생겼을 때 굳건히 자리를 지켜준 창복이 덕택에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새로 일어서게 된 기억을 나는 늘 잊지 않고 있다.

 

언제나 묻는 말 외엔 먼저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을 만큼 과묵하고, 말하지 않아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주었던 창복이는, IMF의 시련을 누구보다도 혹독하게 치르느라 잠시 사진을 떠날 수밖에 없어 나를 안타깝게 했다. 그렇게 못 본 지가 벌써 10년도 넘었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창복이와 꼭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

 

태일이는 나와 가장 많이 어울린 단짝이다. 1993년 우리가 월간사진서울클럽으로 1차 변경했을 때에 가입하여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나보다 한참 아래지만 붙임성도 있고 예의도 발라서 오랜 시간 같이 다녀도 갈등을 일으켰던 기억은 거의 없다. 태일이는 성격이 사근사근하고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다들 좋아한다.

수목원, 새터, 양수리를 늘 함께 누볐고, 한계령이나 노고단 등에 갈 때는 태일이가 운전해야 마음이 편할 만큼 장거리 운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태일이는 인물 사진을 잘 찍어서 예전에 스튜디오를 하는 분이 웨딩 촬영기사로 일해 달라고 했지만 자기 직업을 버릴 수 없어 그냥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래도 우리 모임의 어른들 자녀 결혼식사진이나 젊은 친구들 결혼식 사진은 태일이가 거의 다 찍었다.

 

태일이는 요즘 중국 칭다오에 건너가서 일을 하느라 1년에 한두 번 보기도 쉽지 않다. 태일이는 니콘사진기로 시작했지만 몇 년 전에 펜탁스로 바꿔서 지금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펜탁스 장비를 가지고 있다. 근래에는 새 사진에 몰두해서 새 사진을 잘 찍는다고 인터넷에서는 유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진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병창이 형님은 1993년 여름, 우리가 둘로 쪼개져 내가 남은 팀의 총무를 맡으면서 회원 늘리랴, 두 번째 전시회 준비하랴, 정신없이 바쁠 때에 소리 소문 없이 우리 클럽에 들어와 정말 물심양면으로 큰 힘이 돼 주었다. 한 번에 중견 회원 열 명이 빠져나가 나이 드신 분들과 갓 입회한 신입회원 등 30여 명을 이끌고 동분서주할 때, 병창이 형님의 갤로퍼가 큰 역할을 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차를 가지고 다니려 안 하시고, 나이 어린 친구들은 차가 없어서, 내겐 정기촬영이 아닌 새벽 촬영은 차량 준비 때문에 늘 머리 아픈 일이었다. 그때 형님의 갤로퍼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형님은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시는 덕에 매우 부지런하여 일요일이면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와 함께 사진 찍는 것에 열중하셨다. 형님과 함께 한 이 때의 수목원, 양수리, 새터가 우리에게 절정기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형님은 전시회를 할 때마다 스폰서로 우리 모임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두 번째 전시회부터 일곱 번째 전시회까지 우리가 큰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병창이 형님의 도움이 컸다. 형님이 오시면서 우리 월간사진서울클럽에 활력이 넘쳤으며 대형버스를 이용한 정기촬영 말고도 매주 일요일에 나갈 수 있었다. 형님은 지금 사업 때문에 자주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서울포토클럽에 몸담았던 회원들에겐 영원한 기둥으로 기억될 것이다.

 

동길이 큰 형님은 병창이 형님보다 우리 서울클럽에 더 먼저 오셨지만 내가 함께 하기는 한참 뒤의 일이다. 큰 형님은 비디오를 배우시다가 우연한 기회에 우리 서울클럽에 오셨다. 별로 말이 없으신 동길이 형님을 나는 오랜 동안 형님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나보다 한 살 위면 형님이고, 한 살 아래면 동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다 형님이고 다 아우이다. 78년을 같이하고도 늘 형님으로 대했으나 제대로 알고 보니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연장이셨다. 내 상식으로는 10년 연장이시면 감히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형님이라고 실수한 것은 너무 젊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형님은 최운철 사장님과 동갑이시지만 겉으로 뵙기엔 사장님보다 훨씬 젊게 보여 정말 젊은 오빠처럼 보인다. 동길이 큰 형님을 늘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송구스러우나 사장님보다는 형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감 있어 큰 형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큰 형님은 내게 열렬한 후원자시다. 서울클럽에서 내가 추진하는 일엔 언제나 밀어주시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셨다. 큰 형님은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시어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항상 위트가 넘친다. 동길이 형님이 우리 모임에서 가장 즐겁게 사신다고 병창이 형님이 늘 부러워하셨다.

 

광옥이 형님은 좀 특이하게 만난 경우이다. 형님의 큰아들인 보길이를 내가 2학년 때 담임을 한 덕에 담임과 학부형의 관계로 만났고, 만나는 순간부터 형님 아우가 되었다. 광옥이 형님은 고향이 해남이고, 병창이 형님은 진도여서 고향이 가깝고, 지금 두 분 다 화곡동에 살고 있어 두 분끼리 쉽게 친해져, 서울서 만든 고향 친구가 되었다. 두 분이 다 나를 아껴주시어 시간만 되면 어디든 같이 가려 하시고 틈만 나면 술 한 잔 하자는 전화를 자주 주지만 내가 시간이 없을 때가 많아 같이 못하는 것이 늘 아쉽다.

 

대하는 지금 내가 자주 만나는 서울포토클럽의 막내인 셈이다. 소금과 동갑이니 굳이 막내라고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남자 회원 중에서 구원이 형님과 대하하고 셋이 요즘도 자주 만나니 막내라고 얘기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대하는 사진을 같이 하던 중간에 일본으로 취업을 나갔다가 들어와 몇 년을 쉬다가 다시 만났다. 처음 가입했을 때나 지금이나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철이 없음이 대하의 장점인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진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대하가 진정한 사진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한 번은 만나다보니 이젠 정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