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혹은 인연

2021. 7. 18. 11:17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남자 학교에서만 근무하다 보니 여자 제자가 없는 것이 늘 아쉬움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예쁘고 착한 여자 제자 셋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내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직계 제자가 스무 명쯤 되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니 남자 제자야 걱정할 것이 없지만 여학교에 근무할 일이 없으니 어디서 꿔올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방법은 사진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19908월말 어느 토요일에 2학기가 시작되면서 당시 2학년이었던 우리 반의 진규가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가게 되어 송별회를 겸한 MT를 경기도 장흥으로 갔었다. 말이 MT여서 반 아이들이 전부 참여한 것은 아니고 희망자만 데려 갔다. 당시 환상의 콤비로 불리던 반장 세근이와 부반장 환석이, 떠나는 당사자인 진규, 그리고 경률이, 세연이, 영국이와 또 영국이, 세희, 승호, 치형이, 준영이 등의 아이들과 담임인 내가 12일의 일정으로 장흥 수련원의 막사 한 동을 빌려 하룻밤을 새우려고 간 거였다. 숙소에 짐을 놓고 토탈미술관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다. 여기는 사진을 찍으러 자주 다녀 내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아이들이 같이 다니면 부담이 된다고 자기들끼리 따로 보겠다고 하여 나 혼자서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었다.

 

여유 있게 구경하며 조각품 전시장이 아닌 한쪽 귀퉁이의 지붕이 판자로 된 오두막집 앞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갈까 살피는데 오두막집 문이 열릴 듯 열릴 듯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 안에 있는 아이들이 나올까 말까 망설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70-210mm 줌 렌즈를 장착하여 문 앞에 초점을 맞추고 주시하며 셔터에 손을 얹고 대기했다. 그러나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세 아이가 튀어나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순간적 판단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았지만 이미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한데 이때 어디서보고 왔는지 우리 애들이 몰려와 다시 찍어야 된다며 그 여자아이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말리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보았더니, 환석이의 정중한 태도에 호감이 갔는지 아니면 시골스런 내 모습에 호감을 가진 것인지, 다시 모델이 되어주기로 해서 오두막집을 배경으로 몇 컷을 찍었다. 주소를 물었더니 서울 아이들이고 홍익대학교 부속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애리, , 정아였다.

그 중 애리가 키가 늘씬하고 연두색 상의에 끈이 달린 연두색 긴치마를 입고 연두색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 동화 속에 나오는 알프스의 소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 아이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올 때, 부반장인 환석이가 선생님 제가 저 애들 데려와서 함께 놀았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십시오.” 하길래, “그래 능력 있으면 해봐했더니, 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잠시 뒤에 셋이 쫄래쫄래 따라와서 같이 우리 숙소로 갔다.

 

우리 아이들이 신이 나서 한 팀은 밥을 한다, 한 팀은 찌개를 끓인다, 야단을 떨고 또 한 팀은 여자아이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고 수선을 떨었다. 여자아이들도 앉아 있지 않고 같이 도와서 밥 준비를 끝내어 즐겁게 밥을 먹고, 재밌게 놀았다. 확실히 노는 자리엔 여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자리였다. 노래하며 놀다가 시간이 아홉 시가 넘어 세근이 세연이와 함께 아래 도로에 내려와 택시를 태워 보내주었다. 장흥에 다녀온 후, 애리와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았고 내가 그 다음해에 뜻하지 않게 3학년을 맡게 되어 국어 참고서, 문제집, 예상문제 등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다 보내주었다.

 

그해 대학 입학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가 나올 즈음에 엉뚱한 곳에서 애리가 이화여대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그 부모님이 고마워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선배 선생님의 친한 친구 분의 딸이었다. 그런 저런 인연으로 그해 여름 백령도에 사진 찍으러 갔을 때, 거기 근무하시는 애리 아버지의 후의를 입기도 하였다. 대학에 간 뒤에 두어 번 만나고는 직접 소식은 끊겼지만 정 선생님을 통해서 가끔 소식을 들었다. 지금도 이화여대 후문 쪽으로 차를 타고 지날 때면, 도로변 가의 음식점 이름인 내 사랑 알프스를 쳐다보면서 그날의 애리를 생각하곤 했다. 나는 애리가 결혼할 때에 결혼식장으로 축하를 하러 가서 오랜만에 애리 얼굴을 보고 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보는 순간 선생님!’하고 놀라서 나도 놀랐다. 선배 선생님을 통해 청첩장을 받고 갔던 거였다.

 

1993년 가을. 대전 엑스포가 막바지에 이른 10월 어느 날 우리 학교 2학년도 관중 동원의 일환으로 대전 엑스포 현장에 가게 되었다. 12일의 일정이었으나 대전엔 숙소가 모자라서 잠은 속리산까지 가서 자고 오는 어처구니없는 여정이었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이 없다고, 막판에 전국의 학생들 대거 동원하여 하루에 27만 명 내외가 들어오니 어디고 줄이 장사진이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관람하러 온 사람 구경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진기 가방을 메고 어슬렁거리니까,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온갖 사투리로 필름 한 통 달라, 사진기 작동 안 되니 봐달라등 나를 무슨 사진기사로 알고 찾아오는 학생들 때문에, 오히려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필름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 팔을 수는 없었지만 작동이 안 되는 사진기들은 대부분 접촉 불량이거나 전지가 방전된 것들이어서 손쉽게 응급조치를 해줄 수가 있었고, 거기다가 필름을 끼우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아서 이래저래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다.

 

관람시간이 다 끝나고 우리 학교 학생들도 숙소인 속리산으로 가기 위해 집결장소로 모일 때가 되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입구로 나오다가 언뜻 눈에 확 띄는 얼굴을 보았다.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여자아이 넷이 걸어 나오는데 그 중의 한 아이 얼굴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뛰어나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어느 학교냐고 물었더니 공주사대 부속 고등학교 1학년으로 견학을 겸한 소풍을 왔다고 다소곳하게 대답하였다. 그 대답하는 태도도 서울 아이들과는 달랐지만, 공주사대부고는 내가 20년 전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곳이어서 거기 학생이라고 하니 기억이 새롭고 반가웠다.

 

공주사대부고는 그때까지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충남에서는 제일가기 어려운 고등학교였다. 공주사대부고 학생이라면 중학교 때 전교 5등 이내에 들었을 거였다. 기억이 새로워서 이것저것 물었더니 집이 예산이라고 했다. 여러 얘기 끝에 사진 두어 컷 찍고 주소를 받고서 헤어졌다. 이렇게 만난 아이가 승연이다.

 

서울로 올라와서 사진 몇 장과 책을 보내주었더니 편지 두어 번 오다가 어느 날부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잊고 지냈더니 몇 달 뒤에 승연이에게서 안양의 평촌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는 편지가 뒤늦게 왔다. 전학을 하고 그 와중에 정신이 없어 소식 못 드렸다는 거였다. 그 편지가 무척 반가웠다. 그 뒤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고등학교 국어나 문학 등의 참고서나 문제집을 가끔 보내주곤 했다.

 

승연이는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에 합격해서 19964월 서울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승연이를 자주 불러내어 OB베어스, 송스 피자, 진미 등에 데리고 다녔다. 우리 제자들과 모임을 가질 때도 자주 불러서 같이 만났다. 승연이는 대학교 4학년일 때도 고등학교 2학년처럼 보여 사람들이 내게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큰딸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누가 승연이더러 나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으면 선생님에게 찍혔다고 말하는 것이 귀여웠다. 글쎄 내가 찍은것인지는 모르지만 비록 여학교에 간 적 없어도 승연이도 내 제자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고 다녔다.

 

승연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계 기업에 취업하여 다녔다. 꿈이 일기예보 앵커라고 했는데 내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2000년에 학교에 계약직으로 왔던 역사과의 윤주 선생이 승연이와 같은 학과 동기라고 해서 놀랐다. 그래서 셋이 만나 저녁을 함께 하기도 했었다. 승연이는 결혼을 할 때 내게 알리지 않아서 몰랐고 지금은 소식이 끊겨서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하지만 사진을 하면서 만난 좋은 추억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