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다시 만난

2021. 7. 18. 11:27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내가 서울클럽 총무를 맡고 있으면서 세 번째 전시회를 준비할 때였던 것 같다. 저녁 때 충무로 현상소에 갔다가 시간이 많이 늦었다. 을지로 3가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가다가 나는 눈에 익은 얼굴을 만났다. 경희대 국문과 84학번인 상희였다. 상희는 작은 키에 무겁고 큰 맨프로트 055삼각대를 들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상희 아니냐?’고 물었더니 놀라면서 맞다고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어서 길게 얘기할 수가 없어서 사진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나도 사진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고는 전시회 준비로 바쁘니 다음에 연락하자고 얘기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나는 상희에게 지금 전시회 준비 중이니 그리로 꼭 한 번 오라고 당부했다.

 

전시회를 할 때 많은 사람이 찾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 오라고 하기는 좀 쑥스럽다. 나는 가까운 친구라 하더라도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라고 하면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냥 알아서 와주면 고맙고 흐뭇하지만 내가 연락을 했다가 안 오면 서운한 생각이 들어서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아예 연락을 하지 않고 그냥 클럽에서 만든 초대엽서나 한 장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전시회를 개막하는 날은 무척 성대하게 잔치를 열었다. 사람을 초대해 놓고 그냥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예총회관에서 전시회를 하는 많은 팀 중에 개막잔치를 가장 성대하게 하는 것이 우리 서울클럽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개막식 날은 초대 손님으로 자리가 붐볐고 우리 회원들은 잘 먹지도 못하고 접대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생각지 않게 개막식에 상희가 왔다. 사실 나는 좀 한가한 시간에 오면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와 사진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상희는 개막식 당일에 온 거였다. 전시회 때 내가 부르는 친구는 경후와 천안에 있는 수명이 정도였다. 수명이가 상희와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얼굴을 아는 정도는 되어서 그날은 수명이가 상희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고맙고 미안해서 상희에게 조금 한가할 때 다시 오라고 일렀더니 전시회가 끝나기 전에 상희가 다시 왔다. 상희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결혼을 않고 있었다. 상희 얘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께서 오랜 시간 병상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병구완을 하느라 혼기를 놓친 것 같았다. 내가 자세하게 물을 수는 없었고 그런 정도로 이해를 했다. 상희는 아이들 과외를 하면서 지낸다고 했고 사진에 관심이 생겨서 막 시작하려는 단계였다.

 

나는 상희를 바로 서울클럽에 가입을 시켰다. 상희가 들어 온 것을 가장 반가워하신 분이 성 교수님이시다. 교수님은 상희의 안존한 태도를 아주 좋아하셨고 상희는 예의가 바라서 성 교수님뿐이 아니라 누구나 다 좋아했다. 나는 든든한 후배가 우리 클럽에 들어 온 것이 무척 흐뭇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대학에 다닐 때는 잘 몰랐던 상희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상희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나를 잘 챙겼다. 나야 어디가나 인복이 많아서 어려움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상희가 서울클럽에 들어온 것은 정말 내 복이었다. 다만 내가 상희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과외를 하는 것도 쉽지가 않은 것 같았고 여기저기서 결혼 얘기를 자꾸 하니까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상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는 여러 모로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딱히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3, 4년이 흘러 간 뒤에 상희는 큰 결심을 하고 내게 동의를 구했다. 이스라엘의 키브츠에 가겠다는 거였다. 상희는 거기 가서 일도 하고 돈을 벌면서 다음 계획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런 큰 결심을 했다는데 막을 수가 없었다. 상희는 얼마 뒤에 출국했다. 상희가 키부츠에 다녀와서는 개신교에서 하는 수녀원인 디아코니아자매회라는 곳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상희가 이미 다 알아보고 결심이 선 것 같아서 말리지는 못했지만 나는 마음이 허전했다.

 

상희가 디아코니아자매회에 들어가던 날, 성 교수님과 구원이 형님, 연숙이, 윤정이, 대하와 함께 병천으로 갔다. 병천은 독립기념관이 생기기 전까지는 충남의 오지라고 할 정도로 산골이었다. 병천에서도 깊은 산 속에 있는 그 자매원이라는 곳이 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젊은 여자가 거의 없어서였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이 봉양하면 된다고 하지만 상희가 늙으면 누가 살펴줄 것인가가 마음에 걸렸던 거였다. 상희를 거기에 두고 돌아오는 마음이 영 서글펐다. 마치 나이어린 누이를 늙은 홀아비에게 시집을 보내고 돌아오는 마음이었다.

 

상희는 거기서 오래 생활했다. 그 자매회는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을 하는 곳이라 상희는 해보지 않았던 농사일로 늘 힘들었을 거다. 상희가 거기 들어간 지 1년인가 된 뒤에 다시 성 교수님과 함께 찾아갔었다. 우리를 보고 괜찮다고 말을 하는 상희 얼굴을 보니 괜히 서글퍼졌다. 나는 그래서 파계를 권했다. 지금은 젊으니까 견디지만 늙은 뒤를 생각해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상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돌아오면서도 어떻게든 상희를 거기서 데려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나는 어쩌다 편지로 상희에게 소식을 묻곤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소홀해졌다. 그러면서도 상희가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상희가 거기를 포기하고 나올만한 근사한 미끼가 내게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상희는 병천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농장이 있다는 전남 무안인가에 가서도 오래 있었다. 내가 어쩌다 전화를 해도 통화를 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남자가 전화를 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해서 잘 바꿔주지도 않았겠지만 일터에 나가 있으니 바꿔 줄 수도 없었을 거였다.

 

상희가 서울에 어렵게 휴가를 내어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여일 제쳐두고 상희를 만나 빨리 파계하라고 얘기했다. 늘 웃기만 하던 상희도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그 자매회에서 젊은 여자들이 빠져 나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숨기고 알려주지 않더라는 거였다. 그런 일을 두어 번 겪고는 상희도 배신감과 자매회에 회의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깊이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내려가서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어느 날 상희가 전화를 해서 보니 강릉이었다. 강릉은 상희 어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내가 깜짝 놀라서 나왔나?’하고 물었더니, ‘, 저 나왔어요.’ 했다. 정말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상희는 그렇게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오라고 했더니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더 효도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20071월에 상희는 고향인 태백에서 친구들의 중매로 초등학교 선배를 만나 결혼했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이 험하다고 했지만 나는 환석이를 불러 같이 태백에 가서 상희 결혼식을 축하해주고 왔다. 상희는 지금 태백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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