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로맨티스트(Romanticist)

2021. 7. 18. 11:38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글을 올리고 사진도 내고 하니까 나를 가르쳤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하던데 웃기는 소리다. 내가 겸손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나에게 사진을 가르쳐주신 분은 딱 한 분 성낙인 선생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진기를 오래 만진 것은 가보카메라 덕이었고 사진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성낙인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신한다.

 

내가 성낙인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클럽에 가입하면서 부터였다. 처음엔 선생님께서 많이 근엄해 보이셔서 가까이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따뜻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교직에 있는 것을 선생님께서 좋게 봐주셔서 가까워지게 된 거였다. 선생님께서는 늘 유머가 넘치시고 따뜻한 정이 많으신 분이셨는데 대단한 멋쟁이셨다.

 

선생님은 1927314일에 서울에 태어나셔 20111126일에 영면하셨다. 서울에서 태어나셔서 평생을 서울에서 사시다가 가신 거였다. 선생님의 어르신께선 대한제국 순종화황제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다. 1921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에 그 호위임무를 맡으셨는데 뒤에 그에 대한 훈장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내게 해주신 적이 있다.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회 졸업생이셨다. 조소과(彫塑科)를 졸업하신 정통 미술인으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사진기를 다루셨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동명이인인 서울대 총장 이야기만 넘쳐나고 선생님에 관한 내용은 볼 수가 없어 어이가 없다. 다만 2016118일자 인터넷 신문인 뉴스시에 개교 70주년 기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미술대학 옛 모습들이라는 전시회에 ?이번에 전시하는 사진들은 대부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회 입학생인 고 성낙인 선생이 찍은 사진들이다. 성낙인 선생은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부 조각과를 다녔다.

 

이후, 본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대학의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기록사진에는 1953년부터 65년까지 미술대학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술대학 신입생들의 초상사진부터 실기실 풍경, 스케치 여행 사진, 입학식 및 졸업식 광경까지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다.?이라고 나와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선생님은 한국창작사진작가협회회장(1993 1999), 한국사협부이사장, 이사장 직무대행(1996 1999)을 역임하셨고 아홉 번의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2005년엔 한국예총 예술문화 대상을 수상하셨다. 전 세계에서 100만부 이상이 팔린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사진학 강의를 배병우 선생과 함께 번역했고, 사진의 미학,사진의 특성과 가치, 현대사진의 풍조, 등 사진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셨다. 선생님은 홍익대대학원의 사진학과 교수로 재임하셨고 거기서 정년퇴임을 하셨다.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훌륭하신 분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복이었다. 선생님은 어딜 가시나 편을 가르시지 않는 분이셨고 누구에게나 따뜻하셨다. 촬영을 나가서도 조용조용하게 설명을 하시고 품평회를 할 때도 누구의 사진이든 늘 장점을 먼저 말씀하신 뒤에 단점은 우회적으로 지적을 해주시어 사진을 낸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하셨다.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사진가가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처음 사진을 하는 사람도 자기 사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배려해주시는 이런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선생님은 여자 얘기도 많이 하시지만 그런 얘기가 전혀 천박하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사람이 하면 기분 나쁘게 들릴 이야기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여자회원들이 다 좋아했다. 선생님은 술과 담배를 전혀 안 하시면서도 회원들이 함께 하는 자리는 어디든 마다 않으시고 같이 하셨다. 나는 그런 부분도 선생님께 배우려 했지만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신 적은 없지만 춤은 대단하시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었다. 선생님께선 미국에서 들어온 댄스교본을 번역하셨다고 했다.

 

선생님은 영어뿐만이 아니고 일어도 능통하셨다. 일본에서 사진가들이 오면 대부분 선생님을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할 정도였고 일본에서 온 사진가들이 서울에서 사진기점포에 들를 일이 있으면 선생님과 동행하기를 원했다고 하셨다. 일본에서 나오는 사진잡지를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일본인 지인도 계셨고 선생님께서 사진에 관한 일로 일본에 가면 거기 사진가들이 융숭하게 대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셨다. 그만큼 선생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정통 사진가이셨던 거였다.

선생님은 사람을 모아서 앞에 서시거나 패거리를 만들어서 세를 과시한 적이 전혀 없었다. 젊어서의 일은 내가 잘 알 수 없지만 노년의 모습을 보면 젊어서의 일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분의 위치라면 우리나라 사진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이지만 그런 일에 정말 한 번도 나서지 않으셨다. 주변에서 한국사협 이사장 선거에 출마하시라고 자주 권하셨지만 그를 굳이 마다한 것은 그 자리가 사진을 찍기 위한 곳이 아니고 정치를 하는 자리여서 싫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부이사장직을 수락한 것은 사협에 정통 사진인도 한 사람 쯤은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였을 것이다.

 

사진 때문에 만나 뵌 분이지만 선생님은 신사의 멋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 신사의 의미는 보통의 남성을 대접하여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 ‘양복을 의젓하게 차려입은 남자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품행과 예의가 바르며 점잖고 교양이 있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양복을 입지 않아도 겉차림이 화려하지 않아도 신사인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흐른다. 선생님께선 타고난 로맨티스트(Romanticist)이셨다. 로맨티스트의 사전적 정의는 성격이나 분위기가 현실적이기보다는 신비롭고 달콤하여 환상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지만 현실 속에서 신비롭고 환상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 진정한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하는데 선생님께선 항상 그런 분이셨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이 자기 색깔이 없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나는 맨 날 사진기를 들고 다녀도 기()가 흐르지 않지만 선생님은 사진기를 들지 않아도 기가 넘치신다. 지나가는 여자의 허리, 엉덩이, 다리를 한 눈에 파악하시는 그 눈길에 언제나 놀랄 따름이다. 나는 내 사진의 전부를 선생님께 배웠다고 자부하고 있다.

 

내가 만난 서울 사람은 몇 안 되지만 하나같이 깍쟁이였다. 대부분 자기만 알고,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주는 데는 인색하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이 들었지만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정말 품위 있는 가정에서 자란 진정한 신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취미로 사진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보카메라의 덕이고 어디 가서 사진이론을 꺼낼 수 있게 된 것은 선생님의 덕이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내가 잘 안다. 나는 사진을 하면서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