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8. 11:40ㆍ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나는 예능에는 전혀 재질이 없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는 좋아했지만 음정박자가 제대로 맞게 부른 노래는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들 내가 목소리를 타고나서 노래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지만 불행히도 절대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내가 음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래에 욕심을 부린 적은 없지만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나는 그림도 잘 그리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림에서 구성도 모르고 색감도 둔해서 실기시험을 보면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의 기본 점수만 받곤 했었다. 그러니 사진을 시작해서도 내가 사진에 관심을 갖고 오래 할 줄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사진기를 오래 만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가보카메라 사장님을 만나서였고 사진을 오래 찍게 된 것은 『서울포토클럽』에 가입하여 끝까지 거기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진클럽에 처음 가입하고는 언제 그만둘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서울포토클럽』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해서 내가 마지막까지 그 간판을 붙잡게 된 거였다.
『서울포토클럽』이 30여 년을 유지해 온 것은 전적으로 클럽에서 지도교수로 모셨던 성낙인 선생님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면서 분열을 했지만 『서울포토클럽』은 한국사진계를 대표하시는 분이 중심을 잡고 계셨기 때문에 많은 부침이 있었어도 오랜 세월을 꿋꿋이 버텨온 거였다. 게다가 『서울포토클럽』의 시작이었던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에서 1992년 1월에 처음 열기 시작하여 『서울포토클럽』에서 2005년 3월에 마지막으로 열었던 격년제의 전시회고 큰 몫을 한 셈이었다. 『서울클럽』의 전시회는 모두 일곱 번이었는데 그 일곱 번의 전시회에 모두 참여한 사람은 『서울포토클럽』의 정신적 지주이셨던 성낙인 지도교수님과 그 후원자 최운철 가보카메라 사장님, 그리고 지금도 가깝게 지내는 동근이와 내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네 사람만이 일곱 번의 전시회에 참여한 거였다.
제 1회 전시회 1992년 1월 14일 ∼ 18일 예총회관 1, 2전시실
성낙인, 김○배, 임○철, 이○석, 최운철, 주○홍, 유○권, 김○필, 이동근, 이영주, 박○우, 최○용, 고○학, 이○민, 홍○우, 임○자, 남○미, 고석관, 김창복, 김○규, 김○중, 양○준, 이○자, 김○중, 김○록, 공○범, 권○선, 남궁○영, 이○숙, 표○신.
제 2회 전시회 1994년 1월 14일 ∼ 18일 예총회관 1, 2전시실
성낙인, 김○배, 임○철, 이○석, 최운철, 김○필, 이동근, 이○희, 이영주, 최○, 고석관, 김창복, 양○준, 김○중, 정 영, 권○선, 이○일, 이○진, 이○희, 이○길, 김○배, 윤윤웅, 한○립, 송○순, 김○기, 박○남, 윤태일, 노○호, 박병창.
제 3회 전시회 1996년 1월 25일 ∼ 28일 예총회관 1, 2전시실
성낙일, 김○배, 최운철, 주○홍, 김○필, 이동근, 이영주, 홍○우, 고석관, 김창복, 정 영, 권○선, 이○희, 윤윤웅, 김○기, 윤태일, 박병창, ○연숙, ○정임, 정동길, 이○주, 이○건, 배훈식, 이○현, 강○수, 최광옥, 강 현, 양○종.
제 4회 전시회 1998년 1월 18일 ∼ 1월 21일 예총회관 1, 2전시실
성낙인, 김○배, 최운철, 주○홍, 이동근, 이영주, 홍○우, 정 영, 권○선, 고석관, 이○진, 윤태일, 박병창, ○연숙, 정동길, 이○주, 배훈식, 이○건, 박○정, 최광옥, 허준배, 강 현, 서○례, 구○형, ○상희, 전대하, 오○석, 정구원.
제 5회 전시회 2000년 1월 21일 ∼ 24일 예총회관 1, 2전시실
성낙인, 최운철, 이동근, 이영주, 권○선, 이○진, 윤태일, 박병창, 정동길, 이○주, ○연숙, 배○식, 이○건, 최광옥, 강 현, 허준배, 서○례, 오○석, 정구원, 구○형, 전대하, ○혜진, 이○희, ○정희, 김○영.
제 6회 전시회 2003년 2월 13일 ∼ 16일 예총회관 제 1전시실
성낙인, 최운철, 이동근, 이영주, 윤태일, 박병창, 정동길, 최광옥, 허준배, 전대하, ○혜진, ○정희, 배○실.
제 7회 전시회 2005년 3월 4일 ∼ 6일 예총회관 제 1전시실
성낙인, 최운철, 이동근, 이영주, 윤태일, 정동길, 박병창, 최광옥, 허준배, ○혜진, ○정희, 박종린, ○경숙, ○영아.
2년 동안 열심히 사진을 찍어도 전시회에 내어 놓을 사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게 맞는 말일 거였다. 다들 자기 일을 하면서 틈이 날 때에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이고 그게 휴일이나 가능한 것인데 나갈 때마다 좋은 사진을 찍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얘기일 거다. ‘좋은 사진’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쉽지 않지만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사진을 몇 년 정도 한 사람이라면 다 알 거였다.
내가 전시회에 내어 놓은 사진을 지금 보면 정말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전시회를 할 때는 기분이 한껏 올라가서 무슨 대단한 작품처럼 생각하고 목에 힘을 주지만 조금 지나고 보면 왜 저런 사진을 전시회에 내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드는 거였다. 그게 나만의 생각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전시회를 앞두고 사진을 선정할 때가 되면 정말 힘이 들었다. 자신이 내고 싶은 사진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 다수가 참석해서 지도교수님을 모시고 선정 작업을 하는데 그게 보통 대여섯 번은 해야 웬 만큼 추릴 수 있었다.
전시회를 한 번 하려면 한 사람당 50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들어간다. 사진을 인화하는 값보다 액자 값이 더 비싸고 액자 값보다 사진집을 만드는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전시실 대관료도 꽤 많이 들어갔다. 게다가 전시회를 시작하는 날 사람들을 불러 잔치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참여하는 숫자가 많으면 다행이지만 많은 돈을 내놓고 선뜻 전시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항상 부족했다. 하고 싶어도 내어 놓을만한 사진이 없으면 방법이 없는 것이고 또 좋은 사진이 있어도 경비 조달이 어려워서 부득이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첫 전시회에 남들이 석 점씩 출품할 때 두 점밖에 내지 못했다. 삼각대를 쓰지 않고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라 20 × 30인치의 대형 사진을 뽑을 만한 것이 없어서였다. 나는 늘 삼각대를 들고 다니면서도 그것을 펴고 찍는 것이 귀찮아 그냥 찍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게 작은 사진에서는 표가 안 나도 크게 확대해서 보면 흔들린 게 그대로 나타나 대형인화를 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 첫 전시회 뒤로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포토클럽의 일곱 전 전시회 중 첫 번을 제외한 여섯 번은 내가 다 주관해서 한 거였다. 참가할 사람을 찾고 사진을 고르고 인화하고 액자를 선정하고 작품이 되어 온 것을 전시장에 거는 것까지 모두 내가 했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가까운 제자들을 불러 우리 제자들이 와서 잔심부름과 액자 거는 일, 전시장을 지키는 일을 해줬다. 15기 광현이와 세근이, 환석이, 영국이, 준호부터 뒤로는 진기, 성준이, 용찬이, 홍찬이, 종건이, 민정이, 세민이 등이 와서 일을 도왔다.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이 와서 일손을 도와 지금도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사진 전시회를 할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 혼자서 개인전을 한다는 것은 너무 부담이 크고 또 내가 전문 사진가도 아니면서 굳이 사진전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기를 사고 사진을 찍으면서 그룹전이기는 하지만 일곱 번이나 전시회에 참여했다는 것도 내겐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추억이다.
'사람과 사진과 사진기 > 서울포토클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청도 양반 (0) | 2021.07.18 |
---|---|
서울 포토클럽1(만남과 헤어짐) (0) | 2021.07.18 |
진정한 로맨티스트(Romanticist) (0) | 2021.07.18 |
하늘로 가신 멘토 (0) | 2021.07.18 |
사진으로 다시 만난 (0) | 2021.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