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양반

2021. 7. 18. 12:03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양반이란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문반과 무반을 아우르는 지배계층에 대한 칭호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전적 의미는 지체나 신분이 높거나 문벌이 좋은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 외에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많이 쓰인다. 청풍명월로 상징되는 충청도가 양반의 고장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조선시대에 충청도 사람들이 문무반의 높은 벼슬을 많이 했다는 징표이겠지만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바로 신분계급을 말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충청도 사람을 양반이라 한 것은 심성이 어질고 언행이 신중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기 때문일 거였다.

 

내 고향이 충청도지만 사람들이 나더러 충청도 양반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사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내 주변에서 보면 충청도 출신 중에 정말 양반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늘 그게 안타까웠고 내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기는 일인데 내 보기에 충청도 양반이라고 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분이 가보카메라 사장이셨던 최운철 님이다.

 

내 나이 서른한 살이었고 최운철 사장님이 마흔 다섯이던 때에 우리는 사진기로 만나서 지금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최 사장님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출신이고 나는 홍성군 장곡면 출신이니 태어난 곳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이로 보나 하는 일로 보나 사는 동네로 보나 서로 가깝게 지낼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처음엔 사진기를 파는 사람과 그것을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나 30년의 세월을 가족처럼 이어오고 있으니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사장님 모습은 친절하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얄팍한 장사의 냄새는 나지 않는, 작은 키에 약간 통통하고 앞머리가 조금 벗겨지고 배가 조금 나온 수더분한 양복 입은 신사였다. 그 뒤로 몇 번 찾아가서 렌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가식이 없고 소박한 사장님의 태도에 이끌려서 나는 사진과 사진기에 대한 모든 것을 최운철 사장님과 의논하게 되었다. 오래 만나다보니 사장님과는 사진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세상사의 문제까지 터놓고 이야기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사장님은 20대 초반에 서울에 올라와서 가보카메라의 점원으로 일을 시작하셨다가 30대 중반에 점포를 인수하시어 가보카메라의 2대 사장이 된 셈이셨다. 내가 가보카메라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가 ‘30년 전통의 가보카메라였는데 장사가 번창했다기보다는 늘 현상유지 정도에 그쳤던 걸로 알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현상유지도 감사한 일이었던 것이 사장님은 날마다 여러 사람들과 술을 드셨고 그 술값을 항상 내셨다는 거다.

 

가보카메라의 오랜 단골손님들, 물건을 공급하는 나까마 아저씨들, 그리고 서울클럽회원들이 오면 점포 문을 닫고 대여섯 명씩 되는 사람들과 길 건너 골목에 있던 동원이라는 술집으로 가서 술을 드시고는 대부분의 계산을 사장님이 하셨다. 전부가 아니고 대부분이었던 이유는 서울클럽회원 중에는 가보가 오랜 단골이 아니어서 술값을 내는 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주일에 5일은 가보카메라에 나갔으니까 매일 거기서 사장님이 내는 술을 마신 거였다. 사장님은 성격이 과격하진 않지만 나긋나긋하지도 않았다. 처음에 기기를 사러 오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 기본일 것인데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셨다. 그저 사면 사고 말면 말고였다. 그냥 구경하러 왔다고 해도 주인이 말만 잘하면 사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도 사장님에게선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진기점포를 하는 분들은 대부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진기에 대해서 잘 안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기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들은풍월이 꽤 많기 때문에 써보지 않은 기기도 말로 멋지게 포장할 수 있던데 사장님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니 처음 인상은 무뚝뚝하다는 것이 맞을 거였다. 게다가 처음 사진을 시작하려고 사진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겐 고급 사진기보다 보급기종을 권하는 것도 놀라웠다. 나중에는 다 고급기종으로 바꿀 사람들이니 처음부터 비싼 것을 권하라고 말씀드려도 전혀 개의치 않고 쓸데없는 돈을 쓰면 안 된다고 저렴한 것을 권하셨다.

 

나는 처음에 펜탁스로 시작을 했는데 남들이 하도 니콘, 니콘을 얘기하길래 사장님께 니콘으로 바꾸는 문제를 말씀드렸더니 일본 사진기 다 거기서 거기니 굳이 돈을 들여서 바꾸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딱 한 번 니콘으로 바꾸려던 생각을 완전히 접은 거였다.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며 내가 니콘으로 바꾸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일제 사진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사장님도 내게 한 번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일제 상품을 팔고 산다는 것이 부끄럽다…….

 

다른 점포에서 기기를 산 다음에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환불을 요구하거나 기기를 바꿔 달라고 하면 그냥 바꿔주는 곳은 한 곳도 없었지만 사장님은 군말씀 없이 선선히 환불해주시거나 바꿔주셨다. 대부분 무슨 이유를 달아서라도 조금 덜 쳐서 내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사장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손님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그런 모습을 자주 보면서 저렇게 장사를 하시면서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그런 생활이 오래 계속 되었고 종로 3가가 귀금속전문상가로 탈바꿈하면서 사장님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점포 세가 계속 올랐고 자리에 밀려서 그 근처에서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겼고 종래는 충무로로 이전하게 되었던 거였다. 나는 충무로로 옮긴 뒤에도 여전히 가보카메라를 내 집 드나들 듯 다녔다. 장사가 안 되고 생활이 힘들어도 내가 가면 언제나 반겨주셨고 꼭 한 잔 같이 하자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사진생활을 하면서 큰 은혜를 입은 분이 두 분인데 그 중의 한 분이 최운철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2000년대 후반에 가보카메라를 접으시고 평택에 내려가서 생활하신다. 나는 자주는 못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꼭 자리를 마련해서 사장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생활이 아직 10년은 안 되었지만 내 힘이 닿는 한 평생 그렇게 하려고 한다. 내가 사장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장사를 하시면서도 서울포토클럽의 촬영과 품평회에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그리고 일곱 번의 전시회에도 모두 참여하셨다. 지금은 사진기점포에 아마추어들이 더 많이 드나들지만 예전엔 사진을 아는 전문가들이 자주 오셨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날린 사진가들과는 대부분 알고 지내셨다. 그게 가보카메라의 역사였을 거였다. 사장님은 어디를 가셔도 앞에 서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진을 좀 오래 찍었다고 무게 잡고 아는 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곁에 있는 사장님을 다시 보곤 했었다.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 고맙고 자랑스럽지만 그 말이 아무에게나 쓰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 가보카메라 최운철 사장님 같은 분에게나 맞는 말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