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8. 12:05ㆍ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1980년대 후반의 내 무대는 종로 3가였다. 나는 1987년 가을부터 종로에 있는 가보카메라와 인연을 맺은 뒤로는 2000년대 초반까지 종로에 직장이 있는 사람처럼 거의 날마다 종로 3가에 나갔다. 거길 나가야 마음이 편했고 거길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늘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 하루 일과의 끝이었다.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에 30년 전통을 자랑하던 「가보카메라」는 200년대 초반에 충무로로 이전했고 50년 전통을 얘기할 무렵에 문을 닫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내가 20년이 넘게 드나들었고 내가 가졌던 수많은 사진기와 렌즈는 모두 가보카메라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라 내 사진기에 관해선 가보카메라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가보카메라에 처음 들렀던 것은 1987년 9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운상가 부근에 있는 대동양행에서 삼각대를 사가지고 오다가 우연히 종로 3가 종묘 가까이에 있는 가보카메라를 보고 호기심에 들어갔던 거였다. 가보카메라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은 당시에 나오던 『월간 사진』이라는 잡지를 통해 그 이름을 많이 봐서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가보카메라는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의 연락처였고 ‘30년 전통의 가보카메라’라는 문구로 잡지에 나와 있었다. 종로3가 지하철 역 5번 출구로 나와 종묘 방향으로 나오면서 80여 미터만 직진하면 시계점포와 함께 사진기점이 있었고 거기가 ‘가보카메라’였다. 종로 3가 대로에 있었으니 눈에 잘 띄고 찾기도 쉬운 곳이었지만 거기까지 갈 일이 그때까지는 없었던 거였다.
나는 그날 꼭 사야할 것은 없었다. 단지 지나는 길이어서 들어가 본 거였다. 그날 나는 렌즈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봤고 사장님은 지극히 사무적인 대답으로 일관했다. 얘기 끝에 아무 것도 안사는 것이 미안해서 『월간사진 서울지부』 클럽에 가입하겠다는 말을 하니까 입회원서를 내어주셔서 나는 원서를 써서 내고 나왔다. 내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몇 발짝 옮겼을 때 사장님이 밖으로 나와서 나를 잡고 “아, 홍성이시네. 나는 덕산 사람이오.” 라고 했다. 그 사장님이 40대 중반의 최운철 님이셨고 그 한 번의 만남이 30년 동안 이어질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면 남대문 사진기점포들과 예지동 사진기 골목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다. 돈이 없어 사지는 못해도 갖고 싶은 것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남대문 대광카메라와 명동 지하상가에 있던 성광카메라, 예지동의 여러 사진기점포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가보카메라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다른 점포는 일체 들어가지 않았다. 밖에서 대충 훑어보는 정도였고 괜히 들어갔다가 거기서 무엇을 사게 될까봐 그냥 돌아와서는 가보카메라에 들렀다가 집으로 오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사실 고등학교 교사가 취미로 사진을 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얼마 안 되는 박봉으로 사진기와 렌즈 필름 등을 자주 구입하려면 정말 생계에 지장을 준다는 원망을 들을 것이다. 난 다행히도 과목이 국어여서 매월 보충 수업비로 20∼30만원은 따로 챙길 수 있었고 사진기에 한참 빠졌던 몇 년은 학습지 문제 출제로 꽤 받은 돈을 전부 사진기에 쏟아 부었다. 그래도 사진기와 렌즈의 값이 워낙 고가여서 마음에 드는 것을 다 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외상으로 사진기를 샀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가진 대부분의 사진기와 렌즈를 외상으로 마련했다. 가보에 나갔다가 진열장에 마음에 드는 렌즈가 있어 만지작거리면 가져다 써보라고 선뜻 내주시는 사장님 덕택에 집에 가져왔고 그것들은 다 내 것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펜탁스 사진기와 SMC 렌즈는 가보에 있는 것을 거의 다 써 봤다. 내가 사진기 렌즈에 열을 올릴 때는 내가 가진 펜탁스 35㎜용 렌즈들이 가보보다 오히려 더 많을 정도였다. 내가 가졌던 펜탁스 LX 사진기는 서울시내 사진기점포 어디에도 없었던 펜탁스의 최고 기종이었고 펜탁스 렌즈 중에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은 다 써본 셈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의 사진기점포들은 전부 중고제품을 취급했다. 밀수로 들여 온 것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외국에서 사서 쓰다가 국내에 들어와 팔면 그것을 사서 되파는 거였다. 그러니 사진기 가격이 일정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얼마를 남기고 파는 가에 달렸던 건데 크고 화려한 점포에 가면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고 허름한 곳에 가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거였다. ‘나까마(なかま, 仲間?)’라고 부르는 아저씨들이 몇 분이 날마다 사진기와 렌즈를 공급해주고 그것을 파는 거였다. 나는 대부분의 사진기와 렌즈를 공급받는 가격으로 구입했다.
나는 35㎜ 사진기를 여러 번 교체했고 중형 마미야 645를 가졌다가 펜탁스 645로 바꿨으며 펜탁스 67 중형사진기와 대형 호스만 45FA 사진기도 가보카메라 덕분에 다 써 볼 수 있었다. 내게 보충 수업비와 문제 출제수당이 보탬이 됐다고 해도 아무 때나 외상으로 내주셨으니까 그런 기기들을 장만한 것이지 가보가 없었다면 그때 내가 가진 것의 1/10도 갖기 어려웠을 거였다. 이런 얘기하면 ‘그게 다 상술이야. 확실하게 갚을 사람인 줄 아니까 외상을 주지, 그거 가져오고 갚느라고 얼마나 고생하는데’ 하고 말하는 사람도 주변에 몇 있었다.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이는 정말 가보 최 사장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사장님이 새로운 렌즈가 들어와서 내게 줄 때는 들어온 가격 그대로 주셨고 내가 쓰다가 되팔려고 하면 가져간 금액 그대로 받으실 때가 많았었다.
나는 가보에 가면 한쪽에 앉아 있지 않고 손님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했다. 사진기, 렌즈, 삼각대, 가방 등에 대해 권해보기도 하고 사진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한다. 예쁜 여자 손님이 오면 괜히 신나 이것저것 아는 체 하기도 하고 우리 사진클럽에 가입하기를 권한다. 처음에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점원으로 생각하여 이것저것 값도 묻고 하지만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가보카메라는 종로 3가 31-1번지에 있었다. 내가 알고 지내는 10여 년 사이에 그 근처에서만 네 번인가 자리를 옮겼다가 충무로로 이전을 해서 10여 년을 버티다가 문을 닫고 말았다. 세상이 변해서 중고사진기를 취급하던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았는데 그 속에 50년을 버텨 온 가보카메라도 있었던 거였다.
가보카메라가 상황이 어려워질 무렵에는 나도 형편이 어려워져서 사는 것보다 내다 파는 것이 더 많았고 이젠 값이 안 나가는 몇 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기계식 필름사진기가 인기가 높을 때가 가보카메라의 전성기였고, 자동초점 필름사진기가 새롭게 인기를 끌 때부터 가보카메라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가 디지털사진기로 완전 탈바꿈을 할 시기에 문을 닫은 것이다.
나 또한 50대에 접어들면서 특기적성수업도 빠지게 되고 부수입으로 하던 일들이 다 끊어지면서 사진기에 대한 열정도 서서히 식었고 사진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 초라한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가보카메라와 내가 열정을 가졌던 사진기와 렌즈에 대해서는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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