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8. 11:43ㆍ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나는 사진을 ‘만남’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사진은 사진기와 만나는 것이고 그 사진기를 통한 사물과의 만남이고 또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과의 만남이다. 사람과의 만남은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나는 이런 만남을 늘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만남 중에는 사진을 통해서 공감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있다 나는 만남을 좋아해서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진기를 통해서 가보카메라를 알았고 가보카메라를 통해서 『서울포토클럽』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서울포토클럽』에 가입했던 때가 1987년 9월이니까 벌써 30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는 서울포토클럽이 아니라 『월간사진 서울지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스물 세 번째의 회원이었으나 지금은 다 떠나고 최운철, 이동근 두 분만 남아 있어 가입 서열 세 번째에 올라있다. 내 뒤로 들어왔다 나간 사람이 2백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포토클럽(Seoul photo club)』은 현재 이름만 남아 있고 실제 활동은 전혀 안하고 있다.
내가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에 가입하던 때는 1인당 국민소득이 4000$을 막 넘어섰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덕분에 중고였지만 고급사진기가 많이 들어와서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엄청 늘어날 때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필름 가격이 세계에서 제일 싸다고 할 정도로 저렴해서 많은 사람들이 콤팩트사진기는 뒤로하고 일제 고급사진기에 매달려 그때부터 일본 사진기가 성공을 하려면 한국시장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보니 여기저기 사진클럽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이름 있는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사진작가로 보일 때였다. 자신의 이름이 없으면 함께 하는 사람 이름이라도 파는 것이 괜찮은 일이고 고급 사진기에 비싼 렌즈를 달아 메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정도였다.
내가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에 가입해서 처음 정기촬영을 따라 간 것은 1989년 4월이었다. 가입원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냈고 클럽에서 만든 명함도 받았지만 내가 가진 장비는 웬 만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촬영을 나가는 곳에 가지고 갈 정도가 아니었었다. 그러다가 장비가 웬 만큼 갖춰지고 몇몇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늘면서 비로소 같이 다니게 된 거였다.
1984년 12월에 만들어진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는 매월 첫 일요일에 촬영을 나가고 셋째 수요일에 종로 3가 ‘돈의문로’에 있는 『일지각』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품평회를 하였다.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가져와 걸어 놓고 보고, 슬라이드필름을 현상해 온 것은 환등기로 비춰보면서 지도교수이신 성낙인 선생님의 평을 받는 거였다. 나는 품평회에도 잘 나가지 않았는데 내놀만한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색해서였다. 사진클럽 회원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 사진을 터득(?)한 사람들이 사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남을 인정할 줄 모르는 고집들이 강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의 지도교수인 성낙인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미대를 나오시고 홍익대대학원에서 사진학을 강의하시는 정통파 사진가셨지만 그 밖의 회원들은 사진에 관심을 가진 아마추어들이었다. 그 중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이라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사진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그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아서 나오는 사람들 등 여러 부류가 함께 하고 있었는데 나는 초보자라고 얘기는 했지만 사진에 대한 이론은 웬 만큼 알고 간 사람이었다. 그러니 앞에 들어 온 사람들이 가르쳐 주려고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기존 회원들과는 겉돌았던 거였다. 그래도 가보사장님이 늘 나를 감싸고 좋게 얘기해줘서 그나마 따라다니는 정도였을 뿐이다.
내가 가입을 하고 한 3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1991년 1월에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가 『월간사진서울클럽』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첫 전시회를 처음 열면서 클럽이 깨어지고 말았다. 먼저 클럽을 만든 사람들은 늘 자기들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뒤에 들어 온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남에게 굽히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는 거였다. 그런 갈등으로 여러 회원이 빠져나갔고 그때부터 내가 총무를 맡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풍파를 겪고서 1999년 7월 4일에 내가 주축이 되어 『월간사진서울클럽』이 『서울포토클럽』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진을 찍는 모임을 자주 갖지 못해서 그냥 『서울클럽』이 되고 말았다.
내가 『월간사진클럽 서울지부』와 『월간사진서울클럽』 그리고 『서울포토클럽』을 통해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은 200여 명이 넘을 것이다. 그 중에는 얼굴 몇 번 본 것이 전부인 사람도 있고, 전시회를 같이 한 사람, 술자리를 아주 많이 한 사람도 있다. 처음 만날 때는 다들 겸손한 자세로 시작했고 또 가깝게 지냈지만 시간이 가면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이 나와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떠나기도 하고 또 더 좋은 곳을 찾아서 가기도 하다 보니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그런 자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울포토클럽』이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가보카메라가 그 사무실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기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사진을 배우고 싶다거나 함께 하고 싶다고 하면 바로 입회원서를 내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부러 권해서 가입을 시키기도 했었다. 세월이 가면서 인터넷이 등장하고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대부분의 기존 사진클럽은 쇠퇴해지고 명맥이 끊어졌는데 우리 『서울포토클럽』도 그렇게 된 셈이다.
나는 『월간사진서울클럽』부터 총무를 맡기 시작해서 『서울포토클럽』이 완전 쇠락할 때까지 계속 총무 일을 했었다. 내가 회장을 맡고 싶었다면 오래 전에 회장을 했을 거였다. 나보다 뒤에 들어 온 분들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나는 늘 총무였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감투는 총무였지만 모든 일은 다 내가 주관해서 했으니 굳이 회장을 맡을 이유도 없었다.
1984년 12월 『월간사진 서울지부』 창립 지도교수 성낙인. 초대, 2대 회장은 이○은,
3대 회장 박○호,
4대 회장 이○호,
5, 6대 회장 김○배,
1991년 1월 『월간사진서울클럽』으로 이름 바꿈. 지도교수 성낙인. 7, 8, 9대 회장 임○철,
10, 11대 회장 김○배,
12, 13대 회장 최운철,
1999년 7월 『서울포토클럽』으로 재창립 지도교수 성낙인. 회장 최운철
2000년 14대 회장 이○진
2001년 15대 회장 정동길
2002년 16대 회장 박병창
2004년 17대 회장 최광옥
2006년 18대 회장 정동길
2008년 19대 회장 최운철
2010년 20대 회장 이동근
1991년 3월부터 계속 총무를 맡아서 모임을 이끌어 왔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이 늘 ‘정통’이라고 자부했는데 그것은 성낙인 선생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은 열 명 안팎의 회원이 한 달에 두 번 모임을 계속 이어서 했었다. 대형버스에서 소형버스로 그리고 승용차 두세 대로 갈 정도로 회원의 수가 줄기는 했지만 우리는 줄기차게 촬영을 다녔고 품평회도 열었다. 그렇게 오래 명맥을 유지한 곳도 우리 외는 거의 없다고 들었다.
이젠 지도교수이신 성낙인 선생님도 돌아가셨고『서울포토클럽』도 이름만 남았지만 내가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서울포토클럽』, 아니 『서울클럽』은 영원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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