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가신 멘토

2021. 7. 18. 11:29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내가 서울포토클럽에서 윤 이사장님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겠지만 나는 그 우연을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고 들어 올 수 있고 마음먹으면 떠나갈 수 있는 곳이 동호회지만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른 거고 또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거였다.

 

윤윤웅 님, 벌써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지만 나는 윤 이사장님을 평생 기억할 거라고 자신한다. 같이 만나서 활동한 기간이 그리 긴 편도 아니고 또 특별한 관계였던 것도 아니지만 이사장님의 그 따뜻한 웃음과 마음은 내 가슴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윤 이사장님을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다.

 

윤윤웅 님은 중랑구 중화동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맡고 계실 때에 우리 서울포토클럽에 오셨다. 1992년 여름이었는데 친구이신 중랑구의회 김현배 의원과 함께 경복궁으로 촬영을 나왔다가 거기서 우리 회원을 만나 얘기 끝에 가보카메라로 오신 거였다. 그때는 우리가 월간사진서울클럽이었고 서울시내에선 상당히 큰 동호회에 해당했었다. 50대에 접어드는 연세들이셨는데 사진을 처음 시작한 마당이었다.

 

입회원서에 본적을 적게 되어있어 원서를 내면 고향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가 있을 때라 입회원서에서 이사장님의 본적을 보시고는 가보 사장님이 나에게 고향이 홍성이신 분이 들어왔다고 말씀을 해주시어 우리 모임에 고향 분이 한 분 새로 가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사장님은 홍성군 금마면이 고향이셨는데 내가 홍성에게 고등학교까지 나왔다고 하니까 학교를 묻고는 우리 학교에 계신 국어선생님하고 외사촌간이라고 하셔서 더 반가웠다. 우리 국어선생님은 그 당시도 모교에 근무하실 때였다.

 

그렇게 만나게 되어 이사장님과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된 거였다. 이사장님하고는 정기촬영만이 아니라 휴일에 둘이 자주 광릉수목원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다른 분들과 같이 촬영을 나간 적도 여러 번이지만 둘이서만 간 숫자가 꽤 많았다. 1993년 봄부터 가을까지 광릉수목원을 정말 많이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중화동까지 보통 다섯 시에 도착을 했고 거기서 이사장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수목원에 도착하면 보통 여섯 시 정도가 되었다. 수목원은 아홉 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내를 건너 사잇문 곁으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여덟 시 40분쯤에 안에 있는 사람들 나가서 표를 끊고 들어오라는 방송을 한다. 그러면 다시 나와서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표를 끊어 다시 들어갔다.

 

내가 나이가 훨씬 아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것을 늘 헤아려주셔서 항상 밥을 사주시고 간식거리를 준비하셔서 나는 사진만 찍으면 되는 일이었으니 늘 휴일을 기다릴 정도였다. 아침에는 일찍 가기 때문에 길이 막히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가을에는 차들이 많아지면 이사장님이 다니는 샛길이 있었다. 나는 이 길을 윤웅로라고 불렀다.

 

이사장님은 성함이 외자로 윤 웅이셨는데 원래 이름은 윤윤웅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좋은 이름이라고 지어주셨는데 동네 이장이 출생신고를 하러 가서 글자 한 자를 빼먹어서 윤 웅이 되신 거였다. 그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 이름을 쓰실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되신 것을 늘 아쉬워하셨다.

 

이사장님과 함께 다니시는 김 의원님은 성격이 너무 괄괄하고 외모도 변두리 조폭두목 같았지만 이사장님은 온화한 얼굴에 말씀도 온화하시고 큰 목소리를 내신 적이 없었다. 웃음이 아주 부드러워서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는 얼굴이셨다.

 

1993년 여름에 내가 백령도에 갈 거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사장님과 김 의원 님, 그리고 조금 뒤에 들어온 한 약사님 등 세 분이 함께 가시겠다고 하여 내가 백령도 가는 표를 끊기로 했는데 그때 무진 고생을 했었다. 백령도 가는 배표는 예매를 하지 않고 당일 아침에 매표를 하는데 그 표를 사기 위해서 하루 전부터 인천항에 가서 줄을 서야하는 거였다. 나는 처음에 그 사정을 알지 못하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갔더니 이미 매표가 끝난 뒤였다. 처음 생각엔 우리 제자 두 명도 함께 가는 거였지만 도저히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인천에 가서 두어 시간을 헤매다가 어떻게 알고 있는 백령도 해병대 연락소를 통해서 표를 두 장 구했고 다른 두 장은 운임의 열 배가 넘는 암표를 구해서 간신히 네 명이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인천에서 백령도까지 아홉 시간이 걸릴 때였다. 배에 사람이 넘쳐서 앉아 있을 자리도 없었지만 연세 드신 어른 세 분과 함께 했더니 특실 같은 방을 어떻게 차지하셔서 어렵지 않게 갔다. 그때만 해도 백령도에 가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고 할 때였는데 운이 좋았던 거였다. 일주일에 배가 두 번 출발하고 백령도에서도 두 번 나오는 거였다.

 

백령도에 가서는 해병대의 휴양소를 얻을 수 있어 사흘을 잘 보내고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나오던 날 비바람이 쳐서 아주 혼이 났다. 사방에서 토하는 소리와 찬송가 소리, 기도소리가 어우러졌는데 이사장님 말씀이 지옥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고 하실 정도였다. 거기 가서 아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와서 이사장님 더 가깝게 지냈다.

 

이사장님은 우리 서울클럽의 2, 3회 전시회에 참여하셨는데 3회 전시회는 순전히 나와의 정 때문에 참여하신 거였다. 김 의원님은 늘 계산이 빠르고 냉정해서 3회 전시회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사장님은 중랑구에서 사진동우회를 만들어 그리로 자리를 옮기셨지만 우리가 4·5회 전시회를 할 때에 화분을 보내주시고 개막행사에 나오셔서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해주셨다. 우리 서울포토클럽을 떠나셨어도 내게는 언제나 곁에 가까이 계신 분이셨고 가끔 중화동으로 오라고 하셔서 술자리를 해주시기도 하셨다.

 

이사장님은 19941224일에 과로로 쓰러지셔서 3개월 동안 경희의료원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일반 환자실로 옮기신 뒤에 연락이 되어 문병을 가서 뵈니 너무 참혹하게 변하신 모습이 말이 나오질 않았다. 회갑을 1년 앞두신 나이셨다. 이사장님은 오랜 시간을 힘들게 재활을 하셨고 나는 1년에 한번 음력 109일 이사장님 생신을 전후해서 찾아뵈었다. 그렇게 7, 8년이 지나신 뒤에는 건강이 좋아지셔서 전동 훨체어를 타고 움직일 정도는 되셨다. 그래서 막걸리 한 잔 정도는 함께 하실 수 있었는데 201358일에 영면하셨다. 부음을 받고 나는 연숙이에게 연락을 해서 59일에 삼육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갔다. 자녀분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사모님하고는 여러 번 뵈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어도 괜찮았다.

 

이사장님이 건강이 좋아지셔서 고향 친구분들이 오랜만에 고향에 가보자고 함께 가셔서 선산을 찾아뵙고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올라오셔 이틀 뒤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슴에 맺혔던 일을 다 하셨기에 마음 편하게 세상을 뜨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무리하게 지방 나들이를 다녀와서 힘이 부쳐 돌아가셨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 일이겠지만 나는 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장님이 어느 해에 멋진 가죽조끼를 입고 오신 적이 있는데 그 조끼가 너무 마음에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동대문시장에 나가셨다가 마음에 들어 사신 거라고 하셨는데 내가 몇 번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선히 벗어주셔서 내가 가져왔다. 한동안 잘 입고 다녔는데 내가 몸이 자꾸 불어 그 조끼가 너무 작아져서 친구에게 주었다. 이사장님이 돌아가시고 생각하니 그 조끼를 친구에게 준 게 너무 아쉬웠다. 지금은 나도 몸이 좀 줄어서 그 조끼를 충분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그 얘기를 친구에게 못하고 있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