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볼 수는 없지만

2021. 7. 18. 11:25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였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믿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처럼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해도 믿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걸 굳이 억울하다거나 오해라고 해명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남자이니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아닌가?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하면 그건 하늘이 놀랄 일일 거다.

 

내가 만나는 여자는 초등학교 동창과 선후배, 대학 후배 그리고 서울포토클럽에서 만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학교에 계약직으로 왔다간 제자 같은 여자 교사 몇 명과 오랜 시간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떠난 뒤에 다시 만나 술을 마시거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라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지속적으로 만나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서울포토클럽에서 만난 여자들은 내가 총무를 맡고 있을 적에 온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한 바가 있지만 사진동호회라는 곳이 무슨 구속력이 있거나 손익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보니 사람들이 언제나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거였다. 그런 모임에서 만나 20년이 넘게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뭔가 사람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1993년 여름에 내가 방학이라 가보카메라에 나가서 일을 돕던 어느 날 예쁘장한 아가씨가 사진기 케이스를 사러 와서 만났다. 사진기 케이스라고 하는 것이 다 중고인데 가격이 저렴한 것보다 아주 깨끗한 비싼 것을 원해서 조금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말하는 태도와 외모에 끌려서 우리 서울포토클럽에 나오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생각해보겠다고 며칠 뒤에 키가 조금 작은 명랑한 아가씨와 둘이 나왔다. 반가워서 그날 일이 끝나고 사장님과 함께 생맥주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는 우리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왔던 아가씨가 미선이였고 뒤에 온 아가씨가 연숙이였는데 둘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직장 선후배였다. 성격이 서글서글해 보이고 술도 웬 만큼 마시는 미선이와 가보카메라에서 자주 만났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모임의 내 나이 또래들은 대부분 미선이에게 호감을 가질 만큼 미선이는 괜찮은 여자였다. 나도 솔직히 미선이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미선이가 나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미선이는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며 맥주를 함께 마실 수 있던 하나뿐인 여자회원으로 같이 마신 맥주의 양이 꽤 많았다. 그러고는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고 말았다.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되었지만 사진 찍다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연숙이의 나에 대한 불만이, 내가 처음에 미선이만 좋아하고 자기는 미워했다는 거다. 내가 미선이를 더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숙이를 미워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전혀 말이 되지 않지만 찔리는 구석이 조금은 있어서 나는 연숙이에게는 늘 설설 기고 지냈다. 미선이는 말없이 떠나갔지만 홀로 남은 연숙이는 정말 우리 서울포토클럽의 감초로 모든 회원에게 큰 활력소로 힘을 주었다.

 

연숙이는 직장 산악부에 오래 있어 전국에 안 다닌 산이 없을 정도였고, 수영, 수상스키, 스킨스쿠버, 스키 등 못하는 것이 없고 안 하는 것이 없을 만큼 다양한 레저 활동을 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었다. 연숙이는 다른 것에 비해 뒤늦게 사진을 시작한 뒤에는 우리 서울포토클럽의 감초로서 내가 할 일을 다해주는 팔방미인이었다. 우리 모임에 재무가 따로 있지만 늘 바빠서 촬영을 자주 나오지 못했는데 그럴 때마다 연숙이가 재무의 일을 도맡아서 했고 음식점 선정이나 서울에 돌아와서 뒤풀이 장소까지 다 섭외하고 다녔다. 예의 바르고 어른들 잘 모실 줄 알아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최고의 회원으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연숙이는 취미생활 뿐 아니라 바느질, 매듭, 음식 솜씨 등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다재다능한 재원이었고, 웬만한 가수 빰 칠 정도의 노래 솜씨 등 정말 우리 서울클럽의 자랑이었다. 나이가 들어가서 다들 연숙이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를 바랐고 나도 신경을 많이 썼다. 연숙의 성격과 자질이라면 어떤 누구와 결혼을 해도 잘 살 거라고 생각해서 내 6촌 아우를 소개시켜보기도 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다.

 

다들 연숙이가 나이 먹어간다고 걱정을 할 무렵에 연숙이는 좋은 사람과 만나 결혼해서 지금 아들과 딸을 두고 남양주시에서 살고 있다. 아이 키우고 살림을 하느라 우리와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큰 행사가 있으면 꼭 와서 함께 하고 있다. 중화동 윤 이사장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같이 조문을 갔었고 지금도 1년에 몇 번은 통화하고 지낸다.

 

정임이는 1995년에 우리 서울포토클럽에 들어왔다. 고향이 광천이라서, 내 제자들과 나이가 같다고 해서, 나를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정임이는 지금 인천여자공예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정임이가 우리 서울포토클럽에 처음 나왔을 때는 꿈 많은 여대생이었지만 벌써 세월이 지나 큰 아이가 군에 가고 둘째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40대 후반의 중년이 되었다.

 

가보 사장님이, 광천이 고향인 대학생이 우리 클럽에 가입했다고 해서 기대했더니 설악산으로 정기촬영 가던 날 웬 촌스런 여학생이 미놀타 사진기에 싸구려 삼각대를 가지고 나타났다. 나는 정임이를 처음 보는 순간 눈으로 통하는 고향의 정을 감지했다. 같이 촬영을 다니면서 촌스럽다고 구박도 많이 했지만 그것이 따뜻한 정의 표현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정임이가 잘 알고 있었다.

 

정임이가 들어왔을 때는 우리가 회장님, 병창이 형님, 광옥이 형님, 태일이, 연숙이, 춘택이 등과 참 많은 곳을 누비고 다닐 무렵이어서 정임이도 참 많은 곳을 함께 다녔다. 정임이의 친한 친구 윤정이는 사진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임이와 함께 우리랑 같이 많이 어울렸다. 윤정이는 가수가 꿈이었던 정말 노래 잘하는 친구였는데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여 사진은 하지 않았어도 관심이 많았다.

 

나는 정임이가 광천에 사는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해마다 명절 때가 되면 고향에 갔다가 서울로 오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광천에 사는 정임이에게 부탁해서 정임이나 그 동생이 광천역에 나가 미리 표를 구했다가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렇게 여러 해를 표를 구해줘서 어렵지 않게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전시회 때마다 고생 많이 해서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으면 늘 핏자라고 대답하던 우리 정임이는 요즘 아이 같지 않게 착하기만 했다. 촌스럽고 착하기만 하던 정임이가 대구에서 결혼식을 할 때는 우리 서울클럽이 정기 촬영을 연기하고 대거 대구로 달려갔다. 이미 결혼 전부터 남편이 될 친구하고는 여러 차례 만나서 술을 마셨고 그 친구는 우리 몇 사람과는 친분이 있었다. 나는 정임이가 결혼을 한 뒤에도 한 달에 두 번은 꼭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그 신랑에게 미리 못을 박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임이는 결혼 후부터 사진을 하지 못했다. 임용고사 준비와 살림을 하느라 못 나온 것이다. 게다가 큰 아들 은산이를 낳아 엄마가 된 뒤부터 더더욱 사진과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지만 그 어려운 임용고사에 당당히 합격을 해서 선생님이 된 것이 훨씬 더 자랑스럽다. 정임이가 사진을 못한다 해도 늘 가까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흐뭇한 일이다.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지금도 가끔 통화는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예전엔 때마다 정임이가 광천 새우젓을 갖다 주어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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