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짝사랑

2021. 7. 18. 12:13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서울포토클럽

 

나는 지난 30년 간 사진에 빠져 있었다. 아니 나는 30년 동안 사진기와 사랑에 빠졌던 거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그 사진을 찍는 사진기를 더 좋아하고 사랑한 거였다. 지금도 사진기에 대한 내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내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내가 사진기를 구입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19874월 말에 학교에 찾아 온 외판원에게서 생각지도 않았던 사진기를 산 것이다. 그 외판원도 학교에 사진기를 팔러 왔다기보다는 동원정밀에서 일본 펜탁스와 제휴하여 상당히 고급스런 사진기를 내어 놓는다는 브로셔를 가지고 잠깐 학교에 들렀던 거로 알고 있다. 그 사람은 홍보하러 왔다가 운이 좋게도 당시 45만원하는 사진기를 다섯 대나 팔았으니 엄청난 횡재를 하고 간 거였다.

 

한 달 급여의 1.5배나 되는 비싼 사진기를 24개월 할부로 구입하면서 내가 집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첫 아이가 8월 말에 태어날 예정이어서 아이 사진도 찍을 겸 예전 탁본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선뜻 구입한 거였다. 그 우연이 30년 필연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고급 사진기를 내가 갖게 된 것에 대해 기분은 엄청 좋았다.

 

사진기를 가지면서 사진기 및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종로서적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책을 보기도 하고 사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책을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사진 서적을 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대부분의 사진 관련 서적은 일본에서 나온 책을 이리저리 인용한 것이어서 제목은 달라도 거기 나온 이야기나 사진은 같은 것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책으로 본 것들이 실제 사진 찍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사진이나 기계에 대해 웬 만큼의 기본지식은 가지게 되었다.

 

그때 내가 사서 읽은 책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사진기술개론이다.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현대 사진가 율스만(Jerry Yulsman)이 쓴 것으로 이복희 님이 번역해서 해뜸에서 나온 거였다. 사진기와 사진에 대한 기초지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내가 사진기와 사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진기를 사고 넉 달쯤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청계천 골목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파는 책을 한 권 샀다. 그 책은 미국 PX 유통망에서 팔리는 사진기와 렌즈에 대한 목록과 가격이 나온 안내서였는데 그때만 해도 사진기의 가격에 관계된 책들은 일반서점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전부 영어로 씌어 있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책을 통해서 그 당시에 유통되고 있는 각 제조업체의 사진기와 렌즈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나는 그 덕에 어쭙잖은 사진기 전문가가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독일과 일본의 사진기 회사에서 나오는 모델들과 가격이 거의 망라되어 있어 어느 것이 더 비싸고 싼 것인지 알게 되고 그 값의 고하(高下)로 고급형인지 보급형인지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누가 사진기에 대해서 말하면 웬만큼 끼어들게 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많이 아는 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본 것들을 사진기점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값도 물어보고 하면서 조금씩 안목을 넓혀 나갔다. 나는 렌즈를 살 돈이 없었어도 시간만 나면 남대문 사진기점에 가서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겨서 이 집 저 집을 드나들었다. 가격도 물어보고 구경도 하면서 가지고 싶은 것에 욕심을 내기도 했으나 그것들을 살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수입은 한정되고 써야 할 곳은 많으니 모두가 그림 속의 떡에 불과했다. 다행히 해가 지나면서 보충수업 수당이 조금씩 올라가서 카드로 물건을 사도 큰 액수가 아니면 견딜 만큼 되었다.

 

렌즈든 사진기든 한 번 바꿀 때마다 510만 원 정도가 들어가 내 주머니 속에는 늘 먼지만 가득했다. 다행히 1992년 이후는 학습문제지 원고료가 웬만큼 들어와 사진기 사는데 큰 도움이 됐지만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모두 사진기와 렌즈에 털어 넣어서 생활에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졌다는 뿌듯한 마음에 거지처럼 살아도 흡족했다.

 

내가 사진보다 사진기에 더 빠졌던 결정적 이유는 가보카메라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갔을 때는 30년 전통의 가보카메라였다가 50년 전통을 내걸기 전에 조용히 사라진 가보카메라는 내 사진 여정 30년 중 20년을 넘게 드나들었던 내게 가장 확실한 동반자였다. 가보카메라는 종로 3가에 있었다. 내가 드나드는 중에 종로에서만 세 번 자리를 옮겼고 그 뒤에 충무로로 이전하였다. 나는 종로에서 충무로까지 항상 가보카메라를 내 집처럼 찾았지만 아날로그사진기에서 디지털사진기로 무게 중심이 넘어갈 무렵에 문을 닫고 말았다.

 

나는 가보카메라 덕분에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내가 갖고 싶었던 사진기와 렌즈는 거의 다 가질 수 있었고 다시 무를 수 있었다. 사진기와 렌즈에 대해서 나만큼 호사를 누린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가보카메라에서 최고급 기기들은 손에 넣어보지 못했지만 그 밖의 것들은 웬 만한 부자보다 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가보카메라가 문을 닫은 뒤에는 몇 곳을 기웃거리다가 지금은 충무로 신성카메라에 드나들고 있다. 여긴 가보카메라와는 많이 다르지만 강 부장이 내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있어서 지금도 카메라와 렌즈를 짝사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진이 필름을 쓰던 아날로그 방식에서 저장장치를 쓰는 디지털 방식으로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에 필름사진기를 쓰던 분들 중에는 디지털저장장치를 쓰는 사진기로 바뀐 뒤에는 사진이 완전히 달라진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던데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사진기 자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을뿐더러 필름이든 디지털저장장치든 인화하면 똑 같은 사진이 된다. 물론 그 방식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진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한동안 디지털로 가는 것을 꺼리다가 지금은 디지털사진기가 내 좋은 짝이 되고 있다. 필름사진기를 여러 개 가지고 있지만 필름 가격이 너무 올라서 필름사진기를 들고 나가는 것이 어려워진 까닭이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새로운 성능의 사진기와 렌즈가 나온다고 덥석 달라 드는 성격은 아니다. 남들이 익숙해져서 다음 기종으로 옮겨 갈 무렵에나 중고제품으로 시작하니까 가까운 후배는 어차피 바꿀 것을 왜 남들이 다 쓴 뒤에 하냐?’고 핀잔을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부화뇌동하는 성격이 아니다.

 

내가 예전만큼 사진에 열정이 없다는 얘기들을 주변에서 하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도 사진과 사진기에 대해 늘 갈증과 갈망을 느끼고 있다. 다만 그 갈증과 갈망을 풀기 위해서 예전처럼 발 벗고 뛰지 않을 뿐이다. 나는 30년을 사진기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