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미미했어도,,,

2022. 6. 23. 06:56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

 우리나라 우주 발사체의 시초는 1993년 발사한 ‘KSR 1호’f고 합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유장수 박사 주도로 개발한 1단 고체연료 추진 과학로켓인데 이후 1997년 2단형 KSR 2호도 탄생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 때문에 고체 로켓의 추력을 더 키울 수 없게 되자 우리 정부는 액체연료 로켓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 결과 2002년 추력 13t의 첫 액체 우주로켓 KSR 3호가 탄생했습니다. 최연석 전 항우연 원장을 이어 조광래 전 원장이 개발을 이끌었는데 조 전 원장은 나로호 개발도 지휘했습니다.

 

항우연은 당초 KSR 3호를 여러 개 묶어 1단으로 하고, 2단은 고체 KSR 2호로 하는 우주로켓을 독자 개발해 2005년 시험 발사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북한발 ‘대포동 쇼크’가 이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렸다고 합니다.

 

북한이 1998년 액체연료를 쓰는 3단 미사일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면서 다단 로켓의 핵심 기술을 확보하자, 정부는 우주로켓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2002년 러시아 기술을 도입하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러시아는 기술 이전 대신 1단 로켓을 만들어 넘기겠다고 입장을 바꿨고, 2013년 발사된 나로호가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2006년 러시아와의 협력을 포기하고 독자 개발로 돌아섰더라면 누리호 발사가 더 빨랐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항우연 연구원들은 “나로호 개발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배운 노하우가 누리호 개발에 큰 힘이 됐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항우연은 나로호 발사에 최종 성공하기 전인 2010년부터 누리호 독자 개발에 착수했고 누리호가 발사에 성공하면서 우주로켓 개발을 위한 30년의 여정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21일 오후 3시 59분 49초.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 발사지휘센터. 정적을 뚫고 여성 연구원의 카운트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0, 9, 8, 7… 엔진 점화, 이륙, 누리호가 발사되었습니다.”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과 장영순 발사체책임개발부장 등 연구원 30여 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누리호 이륙을 확인했다.

 

1단 로켓과 페어링(위성 보호 덮개)에 이어 2단 로켓이 순조롭게 분리될 때마다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연구원들은 이내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발사 875초 만인 오후 4시 14분 36초. “와!” 하는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리호 3단에서 발사된 성능 검증 위성이 지구 700㎞ 궤도에 안착한 것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지난 12년 3개월 동안 오직 이날만을 위해 달려온 항우연 개발진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 “1차 발사 이후 두 달간 밤샜다”

2010년 시작된 누리호 개발은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웠다. 국가 간 기술 이전이 엄격히 금지된 우주 분야에서 오직 우리만의 힘으로 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4년 만에 실시한 첫 엔진 연소 테스트의 불꽃은 채 10초도 가지 않았다. 누리호 개발에는 ‘반세기 전 미국은 달까지 갔다 왔는데 이제와 무슨 우주 개발이냐’라는 냉소적인 여론도 늘 뒤따랐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 2015년부터 누리호 개발을 진두지휘해온 고정환 본부장은 “이렇게 잘 마무리돼 다행”이라며 “누리호는 이제 첫 발걸음을 뗐다. 우리나라가 우주로 나갈 길이 열렸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미 텍사스A&M대에서 위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00년 항우연에 합류, 러시아와 협업한 나로호 발사 등 7차례의 국내 발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고 본부장은 “러시아와 나로호를 개발할 때 러시아가 ‘너희들이 뭘 아냐’는 식으로 우리를 무시했다”면서 “누리호는 우리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 조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움 없이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고 했다. 누리호의 국산화율은 94.1%에 달한다. 로켓 부품 37만개 중 압력·온도 센서 등 기성품과 일부 소형 부품을 빼면 전부 국산이다.

 

지난해 10월 1차 누리호 발사 실패 때 고 본부장은 연구원들과 두 달간 밤을 새우면서 실패 원인을 찾았다. 비행 정보를 담은 데이터 2600건을 역추적했다. 그 결과 3단 산화제 탱크 안에 있던 헬륨 탱크 고정부가 로켓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풀리면서 산화제 탱크 내부에 균열을 낸 것을 확인했다. 고 본부장은 “이후 2차 발사를 준비하면서 빠뜨린 게 없는지 늘 생각했고 매일 조각잠만 자느라 꿈조차 꾼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발사체를 언제 만들지 모르는 깜깜한 시절이 있었다”며 “이제부터는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 “누리호의 모든 것이 새로운 기술 성취”

누리호의 핵심 동력인 75t 엔진 개발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상 연소 시험 도중 설비가 폭발해 고장 났고, 엔진은 연소 불안정으로 여러 차례 터졌다. 20차례 넘게 로켓 엔진 설계를 새로 바꾸고, 184회 1만8290초의 연소 시험을 거쳐 엔진을 완성시켰다. 결국 2018년 세계 일곱 번째로 75t 엔진 시험용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그 과정을 이끈 이가 김진한 항우연 전 발사체엔진개발단장이다.

 

누리호에 처음 도입한 클러스터링(clustering) 기술 개발은 조기주 발사체추진기관체계팀장이 주도했다. 클러스터링은 1단 로켓에 엔진 여러 기를 한 다발로 묶는 기술이다. 조 팀장은 “엔진 4개를 동시에 작동시켜 똑같은 추력으로 작동하는 기술이 중요했다”라며 “누리호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새롭게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로켓 발사대도 새로 개발했다. 강선일 발사대팀장은 “발사체가 최대 추력인 300t에 도달할 때까지 고정했다가 풀어주는 ‘지상 고정 장치’ 개발은 민간 기업 엔지니어를 포함해 60여 명의 개발진이 이룬 성과”라면서 “발사대 개발에 참여한 협력 업체가 갑자기 도산해 개발하던 장비를 밤새워 옮기는 일도 있었다”라고 했다. 강 팀장은 “한국의 우주 연구 1세대가 발사체 사업의 기틀을 닦았으니 후배들은 ‘스페이스X’ 같은 선진 우주 기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누리호 사업에는 300여 국내 기업의 엔지니어 500여 명도 참여했다. 누리호 부품 총조립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맡았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로켓 액체엔진 개발에 참여했다. 발사대는 현대중공업이 주축이 돼 구축했다. 총사업비의 약 80%인 약 1조5000억원이 국내 산업계에 집행됐다. 국내 기업들이 우주 산업 분야에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조선일보. 이벌찬ㆍ유지한 기자

 

 누리호 개발의 총책임자인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지난 12년 3개월 동안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2조원 가까이 되는 국민 세금으로 우리 발사체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늘 “뒤돌아서면 머릿속에서 ‘무엇이 빠졌지’라는 생각만 맴돌았다”고 했습니다. 누리호 발사 이틀 전날인 19일 밤에도 1시간마다 깨며 밤새 잠을 설쳤다고 하는데 누리호 발사가 성공으로 결정 난 21일 밤 10시쯤 온몸에 긴장이 풀린 그는 나로우주센터에 있는 기숙사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고 전합니다.

 

새벽 5시쯤 깬 고 본부장은 깜짝 놀라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는 “(누리호를) 진짜 발사를 한 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렸다”며 “발사대에 누리호가 없는 것을 보고 그제야 어제 발사를 성공한 게 진짜였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발사 성공에 환호를 보냈지만 사실 이 발사 성공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를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 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일 겁니다.

 

우리 항우연 관계자들은 겸손하게 일곱 번째라고 해도 여섯 번째와는 거리가 크다고 했지만 저는 이제 우리 발사체가 바로 눈부시게 발전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민간업체가 주체가 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우리 연구원들의 능력과 연구열을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고 한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