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데

2002. 7. 14. 09:36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제가 즐겨 읽은 김용의 영웅문에 보면, "우리는 우물물이고 저들은 개울물인데 왜 개울물이 우물물을 나무라나?" 하는 애기가 있습니다. 물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개울물도 우물물도 같은 물이지만 그 성격에서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두 물이 물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철 스님이 남긴 말씀 중에 유명한 법어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입니다. 당연한 얘기인데 그 말이 왜 유명한지 모르겠다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고 저도 사실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놀라게하는 진리도 알고 보면 가까운 곳에 있고, 생각보다 평벙하지 않을까요?
며칠 전에 광를 수목원으로 촬영을 나갔습니다. 7-8년 전엔 1년에 20번 이상은 다녔던 곳, 제 사진의 대부분을 익혔던 곳, 지금은 아스라한 기억만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일요일 새벽에 수목원에 도착하여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담장 너머 들어가 사진을 찍다가, 차를 견인한다는 방송이 나오면 유유히 걸어나와 발길을 돌렸습니다. 봄부터 가을 까지는 거의 매 주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주 가던 곳인데 지금은 몇 년에 한번 가보기가 힘든 곳입니다.
너무 많이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수목원이 죽어가고 있다고 하면서 들어오는 사람을 통제하더니 이젠 5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아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토요일, 일요일, 휴일은 아예 사람을 받지 않으니 일요일에 몰래 가고 싶어도 불법침입죄로 걸릴까봐 엄두를 못냅니다.
내집 드나들듯 했던 수목원도 많이 변했습니다. 찾는 사람이 적어서인지 수생식물원도 그 주변도 예전처럼 생기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수요일에 갔었는데 근처에서 온 초등학교 견학반과 유치원 아이들, 그리고 데이트즐기러 온 연인들... 단촐하고 조용해서 좋았지만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쉬는 그런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이어서 제가 수목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할 일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너무 많은 것을 얻고 좋아하는 곳인데 조금 쓸쓸하게 변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같이 간 후배가 예전에 제가 쓰던 펜탁스645를 가져 왔습니다. 제가 가보카메라에 75mm, 120mm Macro 150mm, 300mm ED와 함께 내어 놓았던, 8년간을 애지중지하던 그 펜탁스645를 가져온 것입니다. 제가 내어 놓고는 서울클럽의 다른 후배가 고스란히 사갔는데 오늘 빌려서 가지고 왔다고 가져 왔습니다.
그 사진기를 보는 순간, 예전이 수목원 생각이 더 떠올랐습니다. 제가 수목원에서 찍은 대부분의 사진은 다 저 펜탁스645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120mm Macro 렌즈를 장착한 645를 보니 제 마음이 좀 애잔해져서 만져 보았더니, 그렇게 깨끗하게 조심스레 썼던 사진기가 군데군데 흠집이 생겨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사진기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것인데 어떻게 썼길래 저렇게 험해졌단 말인가....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사진기 주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내가 라이카 R7을 세트로 넘길 테니 645를 통째로 넘기라구. 그랬더니 그냥 자기가 쓰던 것을 쓰겠다고 말을 해서 속 상한 채 이틀을 보냈는데 마침 남대문에 있는 삼정사에서 45mm, 120mmMacro, 200mm 등 해서 200만원에 인터넷에 올려 놓았기에 제가 가져오기로 낙찰을 받았습니다.
R7과 24mm f/2.8, 180mm f/4.0을 내어주기로 했는데 표준인 75mm f/2.8도 구했다면 주기로 하여 제가 좀 보태기로 하고는 어제 바꿔 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는 상태가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양호한 편이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300mm f/4.0 ED 렌즈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다시 645를 구했다는 것이 아주 흡족합니다.
사진기는 사진기이고, 사진은 사진일 뿐인데 왜 저는 아직 사진기와 사진을 혼동하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라이카보다는 제 손에 익숙했던 펜탁스645가 훨씬 더 제 마음에 듭니다. 라이카를 처분했다는 것이 아쉽기 보다는 홀가분하고, 라이카로 찍은 사진보다 못하다해도 제 수준에는 펜탁스가 더 맞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합니다.
왜 저는 아직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지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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