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것이 비지떡?

2002. 8. 11. 08:45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어떤 물건이 가격이 싸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이 있는 일입니다. 똑 같은 물건이 A라고 하는 가게보다 B라고 하는 가게에서 더 싸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물건을 사기 위해 B라는 가게로 가겠지요.
그런데 똑 같다는 것이 모든 물건에 다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렇지만 어떤 물건이 서로 똑 같다와, 똑 같지 않다는 것은 객관적일 수도 있고, 주관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미묘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사진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널리 팔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때에 널리 팔렸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모두 샀다는 것은 아니고, 가격이 저렴한 기계들이 속속 등장하여 부유층이 아니라도 사진기에 관심을 갖게 됬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이 때에도 고급 사진기는 아무나 살 수 있는 저가품이 아니었지만 이제 사진기는 전문가나 일부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35mm 영화에 쓰는 필름을 사용하는 소형사진기의 등장은, 사진기를 특수한 계층에서나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던 것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 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이 소형 사진기의 대명사로 알려진 라이카와 차이스 이콘이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진기업체가 등장하고 나름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3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라이카와 차이스 이콘이 확고하게 자릴 잡았고, 이 사진기들은 50년대 이후 까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를 유지하였습니다.
일본도 30년대 중반 부터 사진기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일본에서나 통할 뿐 세계시장에는 명함도 디밀지 못했는데, 45년 이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 사진기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니 이는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싼 독일제를 사기가 부담스러웠던 미군을 위해 일본에서 생산된 사진기들이 미국시장에 등장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인 것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의 최고 사진가 데이비드 더글라스 덩컨이 사진기를 가지러 미국으로 가다가, 일본에서 소개받은 니콘 렌즈를 써보고는 그 렌즈를 격찬한 이후 일본 렌즈들이 미국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독일에서 만들어 미국시장에 내어 놓던 사진기와 렌즈들은 그 원가가 엄청 상승하여, 고민에 빠졌던 상인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교환 렌즈만 팔리다가 니콘과 캐논의 사진기들이 속속 등장하였고 가격에 비해 성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어 일본의 사진기업체들은 너도나도 미국시장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능이 조금 떨어져도 가격이 저렴하다는 매리트에 많이 팔리니까 대량생산 체제로 갔고, 그러다보니 여러 단점이 개선되고 해서 일본 사진기들은 1960년대 중반 부터 세계 시장에서 독일제를 제치고 단연 우위를 차지하여, 오늘날 사진기 하면 일제 사진기가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패망했을 때, 동독에 있던 사진기 공장과 부속품, 그리고 기술자까지 모두 러시아로 가져간 소련도 일본 못지 않은 사진기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이라는 엄청난 시장을 독점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체제하에서 만들어진 소련제 사진기는 자유 세계와 냉전을 벌이고 있을 때라 서방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자국이나 동구에서만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디자인도 떨어지고 제품의 마무리도 매끄럽지 못하여 상품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제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945년 이후에서 50년대 초반 까지의 소련 제품들은 그 성능에서 독일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하는데 사회주의 국가의 생산적 특성상 품질이 일정하질 않아 상품으로 가치는 많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러시아에서 만든 사진기와 렌즈가 요즘 우리 나라에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500mm반사 렌즈와 1000mm반사 렌즈이며 중형 사진기에 쓸 수 있는 30mm 초광각 렌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렌즈들은 성능에서 썩 괜찮다는 평을 듣고 있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하다보니 싸구려로 인식되어 우리 사진인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30mm 초광각 렌즈를 펜탁스67에 그리고 500mm 반사 렌즈도 펜탁스67에 쓰고 있는데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30mm 초광각 렌즈은 67에서 어안 렌즈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렌즈를 45만원에 사서 마운트개조하는데 10만원 들어갔으니 55만원에 중형사진기 어안 렌즈를 산 셈이고, 500mm 반사 렌즈는 예전에 22만원에 사서 역시 10만원에 마운트 개조했으니 33만원에 중형사진기 반사 렌즈를 구한 셈입니다.
한동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비싼 값으로 팔던 35mm 러시아 제니트 사진기 셑은 지금 10여 만원으로 가격이 떨어졌는데 여기에 들어 있는 300mm f/4.5 렌즈는 생긴 것은 투박해도 그 성능만은 괜찮다고 평이 나 있습니다. 저는 엊그제 이 렌즈를 10만원에 구입하여 펜탁스645로 마운트를 개조하였습니다. 개조 비용이 10만원이 들었으니 배보다 비꼽이 크다고 웃을 일이지만 300mm 망원렌즈를 20만원에 산 셈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요즘 예전에 나온 중형사진기 모스크바나 소형사진기 피드, 조르키, 키에프 등이 야후 경매에 많이 나오고 그 렌즈들도 많이 보입니다.
성능 차이가 많다면 할 말이 없지만, 가격대비 성능에서 충분히 권할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