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가지 재주

2003. 3. 9. 11:01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우리 속담에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밥 빌어먹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가지에 정통하고 한가지만 해야하는데 많은 재주가 있으면 이도저도 아니어서 더 힘들게 산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재주를 가져서가 아니라 사진기 때문에 그 속담을 떠올렸습니다. 사진기와 렌즈가 여럿이다보니 밖에 나갈 때마다, 대체 무엇을 가져가야할지 고민하는 날이 많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십년동안에 이사를 여섯번인가 했는데 멀리 옮겨다니지는 않았지만 홍제동에서 뱅뱅 돌았습니다. 살던 집이 팔리거나 나가라고 하면 옮겨다녀야하는 전세 시절이라 한번 이사할 때마다 참 고역이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전세가격도 같이 올라가기 때문에 그것을 충당하기도 힘들었고, 항상 우리 식구에 맞는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섯 번 째 이사는 무리해서 아주 작은 평수의 연립주택을 사서 갔는데 거기서는 7년이나 살았습니다. 한 곳에서 오래 살다보니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앞집이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야 늘 직장에서 늦게 들어오니까 이웃과 어울릴 시간도 없지만 연로하신 어머니가 압집 아주머니와 가깝게 지내신 것입니다. 딸만 넷인 집인데 다 하나같이 미인이고 성품도 좋아 저도 말로는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집을 이사했지만 지금도 그 아주머니가 종종 제 어머니를 찾아오셔 말동무가 되주시는 모양입니다.
그 막내 딸이 오늘 결혼한다고 해서 제가 결혼식 사진을 찍어주려고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중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시집을 간다고하니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사실 언제 얘기 한번 나눈 적도 없는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입니다.
결혼식 사진은 잘 찍어야 본전인데 그래도 어머니께 마음 쓰시는 아주머니가 고마워서 내가 자청했는데 막상 사진기를 가지고 가려하니 다 필름이 들어 있습니다. 펜탁스 사진기 세 대에는 네가 필름이 둘 들어 있고, 하나는 슬라이드 필름, 라이카와 캐논 T-90에도 각각 슬라이드 필름이 들어 있습니다...
밖에 나갈 때마다 이것을 들고 갈까, 저것을 들고 갈까 하다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기에 편리한 것은 자동초점형식이지만 이것은 플래시가 전용이 없고, 어떤 사진기는 갖고 있는 렌즈가 줌이 아니어서 여럿 필요할 것 같고, 또 어떤 사진기는 줌렌즈 하나만으로 가자니 조금 짧은 것도 같고...
한 시간 가까이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결국 캐논 T-90으로 결정했습니다. TL300 플래시가 있으니 괜찮은데다가 렌즈도 28-90mm 하나면 무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사진기와 렌즈가 많으면 없는 것보다 더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가 많아지면 어떤 것을 가지고 나갈까하는 사치스런 고민도 따르게 마련인가 봅니다.
속담 그른 것이 하나 없다고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곤궁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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