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6. 28. 12:07ㆍ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사진을 찍는 사람 중에 아무 목적이나 목표없이 찍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물을 때는 그저 겸손한 척하지만 마음 속으로야 남이 못 찍는 사진,
나만이 할 수 있는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그런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진기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고, 더 좋은 렌즈를 갖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사진을 찍고자하는 욕망은 사진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출 수 없는 욕망일 것입
니다. 그냥 집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라 하더라도 이왕이면 잘 찍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그러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사진기만 있다면, 더 좋은 렌
즈만 있다면 나도 어떤 대가가 찍은 사진보다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사진을 조금 오래 하다보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진을 찍을 때 주로 슬라이드필름을 씁니다.
결혼식 사진이나 어떤 행사에 가면 컬러네가필름을 쓰지만 제가 마음 먹고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는 반드시 슬라이드필름을 씁니다. 예전에는 코닥에서 나온 엑타크롬64(EPR)을 많
이 썼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책은 후지필름을 쓴 것이 많지만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쓰는
필름이 엑타크롬64입니다. 내셔날지오그래픽같은 잡지나 미국에서 나온 책들은 대개 코닥필
름이고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이 필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랜 기간을 이 필름을 썼습
니다.
그러다가 코닥에서 다시 E100S가 나온 뒤에는 이것으로 바꿨습니다. 35롤 필름이든, 120롤
필름이든 저는 이 필름을 주로 썼습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기 전에는 36컷 35롤 필
름 하나에 4000원 정도 했는데 이 때는 필름값이 아까운 줄 모르고 많이도 찍었습니다. 그
러다가 외환위기 이후 필름 한 롤에 8000원 가까이 하자 필름값도 부담이 되어 웬만한 경우
에는 코니카에서 나온 코니카크롬을 쓰고 있습니다. 이 필름은 36컷 한 롤에 3000원 정도면
살 수 있어 부담이 휠씬 적기 때문입니다.
소위 작품사진을 찍는다고 할 때에 컬러네가필름을 쓰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
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느 잡지(사진세계 7월호)에 주동호 님이 쓰신 글이 제 교만(驕慢)
을 여지 없이 폭로하였습니다.
저는 주 선생님을 뵌 적이 없지만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지방에 사시면서 사진에
관한 주옥같은 글들을 자주 발표하시어 많이 배우고 반성합니다. 그런데 이 주 선생님께서
술라이드필름을 쓰는 것에 대해 한 말씀하셨는데 그게 너무도 예리하게 제 가슴에 닿았습니
다. 원래 슬라이드필름이 인쇄용이란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컬러네가필름은 프린트용
이지요. 즉 사진을 찍어서 책으로 내거나 원고로 팔기 위해서는 슬라이드필름을 써야하지만
그냥 사진으로 뽑기엔 컬러네가필름이 더 낫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쇄를 하거나 필름을 팔기 위한 것이 아니면서 가격이 세 배이상 비싼 슬라
이드필름을 써 왔던 것입니다. 제 핑계는 네가필름은 인화를 할 때마다 노출이 다르게 나온
다, 즉 색상이 일정하게 나오지를 않아서 슬라이드필름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핑계에 가깝고 네가필름으로 보면 어떻게 나왔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어 슬라이드필름을
썼던 것입니다. 슬라이드필름은 그냥 눈으로 봐도 사진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는데 네가
필름은 루페를 대고 봐도 잘 모르니 쉽게 볼 수 있는 슬라이드필름을 쓴 것입니다.
이에 대한 지적을 주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필름(네가필름)을 보고도 사진이 어떤 상태로 인화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는…. 바로 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환등기로 비쳐보는 일은 합니다. 그러
나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다른 핑계를 대면서 굳이 슬라이드
필름을 쓴 것이 솔직한 일인데 다른 변명으로 감춘다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게다가 또, 한 말씀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분은 연세가 많으심에도 오래 전부터 켬퓨터와 포토샾 등을 능숙하게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디지털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필름사진기든, 디지털사진기든 자기가 가진 사진기 파인더를 1000만 번 이상을 본 뒤에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라는 말씀은 더더욱 제 가슴을 저리게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진기를 바꾸는데만 열을 올렸지 언제 한번 제가 가진 사진기를 정말 다 안다고 말할 경지가 되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좋은 사진기만 찾았지 제가 가진 사진기를 구석구석 이해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진 사진기, 제가 가졌던 사진기를 통 털어서 애기한다해도 과연 1000만 번을 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어디 사진기 뿐이겠습니까?
제가 지금 가진 렌즈들은 무척 많습니다. 이게 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갖추어야할 것들이라 자위하고 있지만 중복되어 사용 빈도가 낮은 것들도 아까워서 버리기 못하고 있습니다. 렌즈가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갖고 싶었던 렌즈만 나오면 사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저는 결국 지금까지 사진을 찍는 것에 노력하기보다는 사진을 찍는 장비에 더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번민이 많다는 얘기가 맞다고 하면서도 저는 왜 스스로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 동호 선생님의 글을 보고 스스로 가슴 저린 이 후회가 언제 또 어떻게 변덕을 부릴 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지만 이젠 정말 사진찍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아는 것이 백사장의 모래 한 알보다 작으면서 아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늘 교만에 빠지지 않고 위선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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