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의구하다 했건만

2003. 7. 8. 18:15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지난 일요일에 대관령에 다녀왔습니다.
대관령의 삼양목장이 이제 일반인에게 입장료를 받고 공개한다는 얘기를 듣고 7월 정기
촬영을 위한 답사를 겸해서 가보려 한 것입니다. 대관령 삼양목장은 제가 여러 번 간 곳이
라 여러 추억이 서려 있기도 한 곳입니다. 겨울에도 갔었고 봄에도 갔었지만 이렇게 초여름
에 가기는 처음입니다.


제가 대관령 삼양목장을 처음에 갔던 것은 10년도 훨씬 지난 오래 전 겨울이었습니다. 그
때는 저희 서울포토클럽이 한참 위세를 자랑하던 때여서 45인 승 버스에 45명이 타고 다닐
때입니다. 아마 1월 첫 촬영으로 낙산 일출을 보러 간다고 광고를 내었던 것 같은데 45명이
넘게 와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갈 수가 없다고 돌려보내고 45명만 타고 갔던 기
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그 때 뒤에서 셀 정도의 후(後)참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젊은 축에 속
해 맨 뒤에 앉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은 분이 자리를 뒤로 제키는 바람에 무릎에 닿
아서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양평으로 가면 길이 안 좋다고 영동고속도로를 통해서 올라가기로 하고 강릉으로 갔는데
마침 그 해는 눈이 엄청 왔었습니다. 강릉에 150Cm의 눈이 내렸다는 얘기를 TV에서 봤지
만 솔직히 그렇게 실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강릉에 도착해보니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50Cm의 눈이 내린 강릉은 눈이 담장 위로 올라가
처마 끝에 닿아 있을 만큼 대단했고 도로에는 미쳐 치우지 못하고 계속 눈이 내려 도로 위
로 다져진 눈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릉에 내려가자마자 버스가 미끄러져 길가로 빠졌는데 눈 때문에 밀어 낼 수가 없었습니
다. 사람들이 다 내려서 가까운 민가에서 연탄재를 날라 오고 남의 집 앞에 있는 삽을 가져
다가 눈을 퍼내고 하여 간신히 빠져 나왔는데 그 버스에는 체인도 없고 스노우타이어가 아
니라서 더 이상 낙산으로 가기는 무리라고 하여 다시 대관령을 넘었습니다.


눈이 더 이상 내리면 대관령을 넘어 갈 수 없다는 운전기사의 말에 아무도 낙산에 가야된
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대관령을 다시 넘어와 거기 휴게소에 도착했지만 바
람이 많이 불고 날이 추워 꼼짝없이 버스 안에서 눈을 붙였습니다. 저는 무릎에 통증이 와
서 조금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그냥 속으로 앓으며 날이 밝
기만 기다렸습니다.


휴게소에서 대충 아침을 때우고 올라 간 곳이 삼양목장입니다.
거기에 가니까 눈이 허리까지 차는데 다행이 차가 다니는 길은 불도저 같은 제설차로 눈을
다 치워놓았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유명한 소나무를 찍으러 올라 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 소
나무는 요즘 무슨 드라마에 나왔다고 아주 유명세를 타던데 그 때는 그렇게 유명한 나무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두어 시간을 찍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버스 안에 누가 준비했는지 소주와 쥐포가 몇 순 배
돌고 저와 비슷한 또래가 다 술에 취해 한참을 떠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 서울클
럽에는 저와 비슷한 연배가 열 서너 명이나 되었는데 그 사람들 지금은 하나도 없이 다 사
라지고 저만 남아 이렇게 외롭게 서울클럽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잊
혀진 것입니다. 저와 아주 친하게 지낸 사람도 있고, 그저 얼굴만 아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 다음에 간 것은 늦봄이었습니다.
애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설악산을 갔다오다가 잠깐 들렀는데 겨울하고는 전혀 다른 분위
기였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구릉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그 다음 주에 준배하고 연숙
이하고 셋이 다시 찾아갔던 것입니다. 출입문에서 입장을 통제해서 식혜를 한 박스 사다가
수위아저씨에게 드리고 손이 발이 되게 사정해서 간신히 들어갔습니다. 노란 민들레가 아주
많이 피어 있고 파릇파릇 돋기 시작한 풀들이 아주 보기에 좋았지만 흐릿한 하늘은 영 분위
기를 맞혀주지 못해 그냥 밋밋한 사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다시 겨울에 여행자클럽을 따라 갔는데 눈 속에 거치했던 맨프로트 075삼각대의
조임쇠가 불어져 사진은 몇 장 찍지도 못했습니다. 펜탁스67을 메고 갔는데 다리가 불어졌
으니 더 이상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도 봄철에 두 번인가를 더 갔습니다. 갈 때마
다 거기 모습에 감탄을 하고 왔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은 한번도 찍지를 못했습니다.


그 옛날 함께 갔던 사람은 거의 다 잊혀져 갔지만 이제 다시 그 삼양목장을 찾게 된 것입
니다. 준배는 시골에 일이 있어 못 가고 저와 태일이와 대하, 신입 회원 한 분까지 해서 넷
이 갔습니다.


입장료가 5,000원이나 된다는 것이 우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습니
다. 그래도 마음놓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길을 따라 가다보니 옛 모습 그대로
인데 뭔가 허전한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우리말고도 사진을 찍으러 온 사진인들이 여러
팀으로 있고 여기 저기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영 예전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소가
들어있던 우사(牛舍)는 여기저기 철거하는 모습이라 어수선하고, 제법 자라서 자태가 들어
나는 목초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보였습니다. 저 정도로 자랐다면 벌써 소가 먹었거
나 저장을 위해서 베어냈어야 할 것인데 왜 저렇게 서 있어야 하는 지….


내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태일이 말이 삼양목장이 부도가 나서 소까지 다 팔아버린 것 같
다고 합니다. 소가 없는 데 무슨 목장이란 얘기인지…. 좋은 곳을 찾아 차를 세우고 내려 사
진을 찍었습니다. 하늘마저 흐릿하여 또 하늘 탓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가 조금 안면이
있는 분이 어떻게 여자 회원만 모아서 다니는지 에쿠스와 산타페에 여자들만 가득 채워서
와 가지고는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팀들은 삼각대를 안 쓰고도 문제가 없는지 전부 삼
각대 없이 사진을 찍어서 제가 놀랐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다시 산 캐논 T90과 어렵게 구한 FD20-35mm f/3.5 L렌즈를 가지고 열심
히 찍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간 렌즈는 이 렌즈 외에 탐론 35-70mm f/3.5, 역시 탐론
SP70-210mm f/3.5-4.0, 탐론 SP 350mm f/5.6반사 등 주로 탐론 렌즈였습니다. 필름을 두
롤 밖에 안 가지고 가서 걱정이 되었지만 한 롤을 찍고 나니 더 찍을 것도 없었습니다. 계
속해서 비슷비슷한 광경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계속 생각나는 것은 예전에 여기에 같이 왔다가 지금은 멀어진 사람들이
었습니다. 멀어졌다는 말이 조금 우습지만 지금은 서로 소식도 모르고 지내니 어떻게 생각
하면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영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 말로는 뭐라 표현할 수 없
지만 예전에 와서 사진을 찍었던 곳이 아닌 것 같은 낯선 분위기가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
다.


거기서 나와 오대산입구에 있는 자생식물원에 갔는데 거기도 작년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습
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했던 황진이 시조가 생각났지만 문제는
산도 이제는 옛 산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는데 산천인들 변하지 않겠습
니까?


사람이 변하는 것이야 거부할 수는 없지만 산천마저 변하니 그게 더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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