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8. 31. 10:53ㆍ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요즘은 주말마다 비가 와서 일요일도 개인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제 인터넷 자료를 보니 7주 연속으로 주말에 비가 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처럼 일요일에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지난 일요일에 양수리를 가려고 생각했다가 비가 와서 못 갔는데 오늘은 차량이 마련되지 않아 경복궁에 나가라고 했더니 다시 날이 흐려집니다.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는 하늘이 푸르고 구름이 많길래 경복궁에 가면 아주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지난 사이에 흐려져서 나가야할지 망설여집니다.
지난 광복절에 경복궁 향원정에 가서 찍은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날이 너무 좋아서 35mm보다 67이 훨씬 나을 거라 생각이 들어 67을 안 가져간 것을 후회했는데 라이카 28mm f/2.8로 찍은 사진이 아주 잘 나와서 흡족했습니다. 하늘의 색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산뜻하게 나와서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했습니다. 물론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상당히 흐뭇했습니다.
제가 사용한 라이카 28mm f/2.8은 구형 렌즈입니다. 신형이나 구형이나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어 샀는데 구형 렌즈들은 필터 구경이 작아서 렌즈 앞에 UV필터를 끼우고 그 앞에 PL필터를 끼우면 네 귀퉁이가 많이 먹어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 렌즈 구경을 55mm로 키웠습니다. 정확히 몇 mm인지는 모르지만 50mm f/2.0 표준렌즈도 55mm 필터를 끼울 수 있게 업링을 만들어 끼웠고 겸하여 28mm f/2.8렌즈도 업링을 제작하여 끼운 것입니다. 렌즈 구경이 다를 때는 업이나 다운시키는 어댑터가 나와 있지만 라이카는 그 렌즈 구경이 일제처럼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서 부득이 예지동 김카메라에 가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도 사진의 네 귀퉁이가 잘려서 이번에는 UV필터를 빼고 PL필터만 끼우고 찍었습니다. 그런데도 조금씩 잘려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가보에 가서 물었더니 필터 중에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와이드필터가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더니 그런 필터 하나에 10만원이 넘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 렌즈 앞의 업링을 더 큰 것으로 만들어 끼우면 되지 않을까 하고 김카메라에 문의했더니 58mm로는 불안하니 아예 67mm로 만들면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만원을 주고 67mm업링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것으로 오늘 시험촬영을 하려고 했는데 날이 흐려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제가 라이카에 쓰는 PL필터는 일제 비비타입니다.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고 가보에서 그냥 중고필터를 얻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필터를 끼우면 초점이 안 맞는 것 같아 늘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라이카 오리지널은 못 사더라도 독일제인 B+W필터 정도라면 되지 않을까 싶어 가격을 알아봤더니 55mm PL필터 하나에 73000원이고 좀더 고급스런 것은 15만원이 넘어갑니다. 77mm 고급 PL필터는 그 가격이 30만원이 넘습니다. 이 정도 가격이라면 웬만한 일제 중고 렌즈 가격입니다. 그런데 그 초점이 벗어나는 것 같은 비비타 PL필터를 끼고 찍은 사진이 슬라이드필름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독일제 비싼 PL필터를 끼고 사진을 찍었더라면 아마 필터가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고 혼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필터는 필터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사가들이 독일제 필터와 일제 필터를 끼우고 찍은 사진을 비교 분석하면서 일제 필터를 끼운 렌즈에 여러 좋지 않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인터넷에 올려놓았고 사진까지 올려서 볼 수 있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보면 낭비를 조장하는 일입니다. 일본의 사진가들은 대부분 일제 사진기를 많이 쓰고 있고, 일제 렌즈와 일제 필터를 쓰는데 사진기나 렌즈 필터가 안 좋아서 사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상품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제가 무조건 나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제 렌즈에 끼어 있는 필터를 로덴스톡이나 B+W필터로 바꾸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할 경우 필터 값만 수십 만원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 굳혔습니다. 솔직히 렌즈에 필터를 끼우는 것이 사진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얘기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렌즈를 보호하기 위해 끼우는 필터가 사진의 질을 올려 준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사진가, 안셀 아담스(Ansel Adams)는 그의 저서 사진기(The Camera)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견(visualization)이라는 사진 용어는 사진제작의 정서적·정신적 과정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으며 사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다. 예견에는 촬영 전에 완성된 이미지를 통찰하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으며 사용된 방법은 희망하는 결과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창조적인 과정에서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연습하고 배울 수가 있지만 이것을 넘어서면 개인적인 직감력이나 통찰 영역이며 개인의 창조적인 '안목'은 교육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다만 이해시키고 인도할 뿐이다.
사진은 피사체와 그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유기적, 광학적, 화학적 공정을 수반한다. 이 공정의 각 단계마다 피사체로부터 떨어져서 사진 프린트로 접근해 간다. 가장 사실적인 작품에서조차 피사체와 동일하지 않으며 사진 제작 방법의 여러 가지 영향에 의해 피사체와는 다르게 되어 간다. 사진가는 이 '현실로부터의 이탈'을 강조하는 것도, 최소화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
공정은 우선 카메라·렌즈·셔터라는 기구를 가지고 시작하는 데 이것은 사람의 눈과 비슷한 방법으로 '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카메라는 사람의 눈과 같이 시야 중심에 집중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며 시야 속의 모든 것을 거의 똑같이 명료하게 본다. 눈은 피사체를 훑어 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카메라는 그것을 전체로서 기록하고 고정한다. 게다가 필름은 눈이 가지는 감도 폭의 약간 밖에 갖지 못한다. 계속되는 공정에서 현상, 프린트 등은 최종 이미지에 각각 명확한 특징을 부여한다.
각각의 처리 공정에서 최종 이미지를 형성하는 방법을 이해하면 최종 결과를 창조적으로
제어하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이하 생략〉
결국 사진을 찍기 전에,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과정은 우리가 그 사진이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예견을 하면서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저는 아직 그런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시인합니다. 렌즈 앞에 필터를 장착했을 때 아주 유심히 파인더의 귀퉁이를 살펴보면 잘릴 것인지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전혀 이상이 없는 것처럼 확인했는데 잘릴 때도 있습니다. 그랬을 경우 다음에는 그런 실패가 안 나와야하는데 또 잊고서 파인더 안에 보이지 않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 안심을 합니다.
자기가 가진 사진기와 렌즈의 특성을 확실히 파악하고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 특성에 맞춰 보완을 하면 되는데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이런 문, 저런 문제를 핑계삼아 바꾸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저도 이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으니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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