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진기

2003. 9. 15. 21:09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사진을 찍는 것을 취미로 하면 좋은 것이 사진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진기와 렌즈, 그리고 액세서리를 사서 모으는 재미도 있지만 그런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 더 큰 즐거움입니다.


저는 사진을 취미로 한다고 시작한 지가 벌써 15년이 넘었는데 그 세월 속에 사진으로 인해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처음 만날 때는 다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영원한 동료가 될 것 같지만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떠나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사진을 하는 것을 예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사진인도 예술가가 될 것입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창작욕구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인데 이런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는 사진을 예술로 생각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사진이 좋아서, 사진기가 좋아서 사진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제가 찍은 사진에 만족한 마음을 가지며,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고 싶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예쁜 여자를 사진으로 찍고 싶어합니다. 제 마음에 드는 예쁜 여자라면 돈을 받지 않고도 사진을 찍어주고 싶습니다. 또 얼굴이 예쁘지 않다 하더라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제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주고 싶습니다.


제가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튼튼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진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는 지금 일안반사형식이 여섯 대입니다. 펜탁스에서 나온 것이 K2DMD, Z-1P, Z-20이고, 캐논에서 나온 T90, 라이카의 SL2와 R7을 가지고 있습니다.


펜탁스는 소형 경량화가 자랑이지만, 저는 소형 경량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M시리즈보다는 K시리즈를 더 좋아합니다. K2DMD는 펜탁스 K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묵직하고 부피가 커서 제 손에 딱 맞습니다. 이 사진기는 필름감도를 조절하는 장치와 노출보정을 조절하는 장치가 마운트 뒤에 부착되어 있는 점이 다른 사진기들과 차이가 납니다. 이 조절기구들을 조작하려면 손톱이 빠질 수도 있을 만큼 힘이 들지만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진기에는 모터드라이브를 장착할 수 있는데 아직 까지 모터드라이브는 보지도 못했고 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수동사진기에 모터드라이브를 장착하는 것
을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손때가 묻고 그러면서 검정색 몸체에서 황동 제 빛깔이 들어 나는 것이 아주 보기에 좋습니다. 사진기가 주인을 만난 뒤에 다시는 바꾸지 않고 그 주인과 수명을 같이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펜탁스 Z-1P는 펜탁스 자동초점 일안반사형식의 2세대 사진기 중 가장 고급형입니다. 펜탁스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제1세대 자동초점 형식인 SF계열의 사진기를 내어놓았지만 이 사진기들은 그 당시 자동초점 사진기들 중에서 가장 뒤떨어진 형식이라 시장장악에 실패를 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시 나온 것이 Z시리즈였습니다. 펜탁스의 Z시리즈 중 가장 고급형이 Z-1, Z-1P이고 이보다 조금 아래가 Z-5, Z-5P인데 이 두 기종만 전문가들이 쓸만한 것이고 나머지 것들은 단순한 아마추어용으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Z-5를 구입했는데 아마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이 사진기를 손에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사진기는 Z-1으로, 다시 Z-1P로 바뀌어 내 손안에 있습니다.


그리고는 보조 사진기로 Z-20P를 하나 구입했다가 이것을 다시 Z-5P로 교체했는데 돈이 달려 아는 사람에게 팔아버리고는 아쉬워하다가 펜탁스클럽 장터에서 Z-20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여 보조 사진기로 쓰고 있습니다. Z-20은 기능에서는 현재의 자동초점 사진기들에 많이 떨어지지만 튼튼한 몸체라서 마음에 듭니다. 요즘에 나오는 것들은 다 플라스틱인데 같은 플라스틱구조라 해도 더 튼튼한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펜탁스에서는 다시 제3세대 자동초점인 MZ시리즈를 내어놓았지만 저는 이 기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진기의 기능으로만 얘기한다면 캐논의 T90도 요즘의 자동초점 사진기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초점을 맞추는 형식이 수동이라는 것뿐입니다. 한가지 흠이라고 트집을 잡는다면 몸체가 플라스틱이란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손에 잡을 때의 안정감이 아주 좋아서 삼각대를 안 쓸 때는 이것만큼 신뢰감을 주는 사진기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예전에 추현우 님이 엮은 『카메라정보가이드』라는 책에서 수동사진기로는 최고의 성능을 가진 마지막 기종이라고 추켜세운 것을 보고 그 가격이 저렴하길래 가보에서 샀는데 한동안 아주 잘 썼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진기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전용플래시와 함께 처분했는데 두고두고 생각이 나서 다시 구입을 했습니다.


만약에 사진기를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수동초점에서는 이 T90을 선택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라이카 사진기를 두 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3년 전 어느 날 우연히 가보에 갔다가 거기서 라이카 R7사진기를 구입했는데 일이 되느라 그랬는지 가보에 라이카중고 렌즈가 계속 들어와 하나씩, 하나씩 가져와서 웬만큼 구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진기의 기능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다보니 자주 가지고 나가지도 않게 되고 해서 나중에 펜탁스645와 바꿨습니다. 그러고는 라이카에 대한 미련을 버렸는데 어떤 분이 가진 라이카 SL2를 보니 다시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바가지를 쓰고 예지동 초입에 있는 대광사에서 그런 대로 깨끗한 SL2를 구입하였습니다. 이 SL2는 라이카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만큼 기계적 완성도가 높다는 기기인데 나온 것이 1973년이라 현재에는 기능 면에서 많이 뒤떨어진 기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도 손에 만져보니 아주 흡족하였습니다. 묵직하고 큼직한 데다가 하나, 하나의 조절장치는 확실하게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작동도 놀랄 만큼 부드러워 독일제품이란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솔직히 라이카로 찍은 사진이 다른 일제사진기로 찍은 사진보다 좋다는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기기 자체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남영카메라에 있던 SL2를 또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SL2가 두 대이다 보니 그것도 우스운 일이라 대광사에서 샀던 SL2는 거기로 가져가서 R7로 바꿔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30만원 이상 손해를 보았지만 제가 어리석어서 한 짓이라 감수하기로 하고 맞바꿨던 것입니다.


남들이 고급 사진기를 산다고 하면 '장비병'이라고 말리면서도 제가 이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것들은 제게 있어 가장 아끼는 재산입니다.


사진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어느 날 제 곁을 떠난 것처럼 이 사진기들도 저와 영원히 같이 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언제 마음이 변해서 내다 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심정은 이 여섯 사진기만큼은 제 품안에서 곱게 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고장이 와서 도저히 쓸 수가 없다면 모르지만 쓸 수만 있다면 제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