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물생심(見物生心)

2003. 9. 30. 16:21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사람의 눈보다 간사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귀도 간사합니다. 그리고 입도 간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간사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은 마음이 간사한 것일 겁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진기와 렌즈를 섭렵했다고 자부하면서 이젠 더 이상의 구입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기를 몇 번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직도 눈에 보이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또 귀로 들으면 마음이 동합니다. 이래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충무로에 자주 나가지 않습니다.
예전에 가보카메라가 종로에 있을 때는 일이 없으면 종로에 나갔다가 들어갈 만큼 자주 나갔지만 가보카메라가 충무로로 이전을 한 다음부터는 자주 나가지 않습니다. 사실 이젠 가보에 제가 살만한 것이나 사고 싶은 것은 더 없습니다. 아니 가보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크게 사야겠다고 욕심나는 것은 벼로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펜탁스클럽 장터에 기웃거립니다. 사지는 않더라도 이것은 비싸게 나왔구나, 이것은 너무 싸게 나왔구나 하는 판단을 하며, 팔리는가 안 팔리는가를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거품이 많다고 생각이 들지만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잖아도 예전에 어떤 분이 장터에 내어놓은 렌즈를 제가 비싸다고 딴지를 걸은 일이 있고 그 일로 제가 펜탁스클럽을 그만 두었기에 지금은 저 혼자 생각만 합니다. 그리고 제겐 더 필요한 펜탁스 사진기나 렌즈가 없습니다….


제가 요즘 궁금해하는 것은 펜탁스에서 새로 나왔다는 Dist인가 하는 사진기입니다. 궁금해하는 것이 사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제 돈으로 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디지털사진기가 아닌가 싶은데 저는 디지털사진기를 사고 싶은 생각이 아직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 모로 생각을 해봤지만 제게는 디지털사진기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가격도 무척 비싼 것 같은데 그것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서 놀랐습니다. 아마 많은 펜탁스클럽 회원들이 그 새로 나온다는 사진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 같습니다. 그 사진기가 서울에 도착하면 펜탁스클럽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젠 그런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 펜탁스 LX를 갖기 위해 무척 애를 쓴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않으려고 늘 노력합니다.


남영카메라에 라이카 APO 280mm f/4.0f렌즈가 220만원에 나와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것을 사고자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이 렌즈는 명동카메라에 280만원에 나와 있을 것입니다. 아마 한 때는 330만원까지 불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는 제 생각으로 이 렌즈가 250만 원대까지 떨어지면 어떻게든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제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이카 렌즈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듣고 특히 이 280mm 아포 렌즈는 최단초점거리도 무척 짧아서 쓸모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작년만 같아도 이 가격이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에 들어와서는 조금 생각을 바꿨던 것입니다.


좋은 렌즈가 가격이 싸게 나와서 산다고 한들 그 렌즈 효용이 얼마나 될까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 렌즈를 펜탁스 67에 쓸 수 있다면 고려해 보았겠지만 35mm사진기에서 280mm 렌즈를 얼마나 쓰겠는가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영카메라에 가서 만져도 봤지만 사겠다는 생각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남대문에 가면 카메라하우스에 들리게 됩니다.
거기 김원철 사장님은 저보다 조금 아래 연배이지만 겸손하고 친절한 것이 좋아 서로 통하는 사이입니다. 가보카메라 회장님이나 광운이 형님께는 조금 죄송한 생각이 들지만 자주 간다고 해서 무엇을 크게 사는 것은 아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러 봅니다.


얼마 전에 갔더니 아그파에서 나온 수퍼솔리이트라는 35mm 연동사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출계는 달려 있지 않았지만 거리연동이고 아담한 것이 손에 딱 들어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보이틀랜드 비토Ⅱ는 아주 아담했지만 늘 가지고만 있지 그것으로 사진을 찍을 일이 없어 두어 달 전에 다시 가보에 반납을 했는데 이 수퍼솔리이트를 보니 다시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가격을 물어보니 위탁판매로 30만원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20만원 정도라면 샀을지 모르는데 비싸다고 하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싸면 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사지는 않았습니다.


거기 카메라하우스에 라이카 M5가 두 대나 있습니다. 깨끗한 것은 240만원이 붙어 있습니다. 아마 140만원이라면 또 사고 싶어 몇 밤을 새웠을지 모르는데 240만원이라는 가격이 그런 꿈을 아예 꾸지도 않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갖고야 싶지만 사진기만 240만원에 표준렌즈만 하나 구하려 해도 f/2.0이 50만원은 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300만원을 주고 사진기를 산다는 것은 제 형편에 미친 짓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서 가볍게 포기했습니다.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든, 나이가 젊은 사람이든 그런 욕망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갖고 싶은 것을 다 갖는다고 해서 그 욕망이 끝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엔 필터와 후드 같은 것을 수도 없이 사서 어딘가에 쳐 박아 두고 또 사고, 남이 달라면 아까운 줄 모르고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필터 하나 사는 것도 아까워 몇 번을 생각하게 되고 다시 생각합니다. 이젠 돈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성철스님 시봉이었던 원택스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말을 한참 생각했습니다. 성철스님께서는 돈오돈수하기 위해 일체의 외부와 접촉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밖의 것이 관심을 두면 자신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고 하셨다는 데 그래서 책도 읽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밖의 것들과 접촉하면서 흔들립니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서 그렇겠지만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물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니 차라리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데 어찌 세상 속에 살면서 보지 않고,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제 사진기에 관심을 두기 보다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5년이 사진기에 관심을 두었던 시간이라면 앞으로 25년은 사진에만 관심을 두고 싶습니다. 사진은 사진기도 렌즈도 필름도 아닌 사진을 찍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데 무려 15년을 걸린 것입니다.


이젠 있는 장비나 잘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가진 사진기는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되겠습니다. 렌즈나 필름을 탓하기보다는 아무 흠이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을이 되면서 제가 조금이나마 내적 성숙을 하고 있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을엔 무엇인가 거둘 것이 있어야한다는데 저는 마음으로 거두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제주도...  (0) 2003.10.19
호스만FA45  (0) 2003.10.06
나를 찾아 떠난 여행  (0) 2003.09.20
사람과 사진기  (0) 2003.09.15
사진학과에 가겠다고?  (0) 200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