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만FA45

2003. 10. 6. 22:43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며칠 전에 같은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이 제게 다기(茶器)를 하나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차를 많이 마시기보다는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편인데 요즘에는 하루에 차를 여러 잔 마시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교무실은 자료실이라고 해서 저를 포함해 셋이 한 방을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선생님이 불도(佛道)에 관심이 많고 상당한 진전이 있는데 이 분 덕에 차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이 선생님은 아예 다기세트를 갖추어 놓고 계신데 제가 늘 얻어 마시다보니 저를 위해 다기를 하나 주문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기는 어디서 우편으로 배달이 되어 온 것인데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지만 아주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어 날마다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즐겁습니다. 제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보던 다기라고 하는 것들은 도자기로 만들어지고 제법 큼직한 몸체에다 청자나 백자로 된 것이면 고급인줄 알았는데 이 다기는 그리 크지 않고 속의 잔과 겉의 잔이 아주 짜 맞춘 것처럼 들어맞는데다가 뚜껑도 멋이 있습니다. 다른 다기는 속의 잔에 차를 넣고 잔 속에 넣어 우려 마시지만 이 다기는 겉의 잔에 차를 넣고 우린 다음 속 잔에 따라 마십니다. 속의 잔에 구멍이 뚫리거나 철망을 댄 것만 보던 제게는 아주 색다르게 보여 보기만 해도 정이 흐르는 기분입니다.


지금 까지 차를 마시기야 수백 잔은 족히 되겠지만 언제든 차를 마시는 기분으로 마셨지 다기에 관심을 두어 본 적은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다기를 빼앗아가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고(그 당시에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만든 다완-그렇게도 부르는가 봅니다- 하나 가격이 성 하나와 맞바꿀 정도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날 때 우리 도공을 붙잡아 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오늘날 일본 도자기의 원조가 다 한국에서 끌려간 도공들의 후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입니다.
또 우리 나라에서도 그 때의 다기를 재생하기 위해 피땀 흘리며 노력하고 있다는 어느 도공의 얘기도 들었지만 제가 보기엔 그저 그런 투박한 사발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작은 다기 하나를 선물로 받고 거기에 관심을 두니 전혀 새롭게 와 닿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다기에서만 가지는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사진기나 어느 곳의 풍경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제가 장황하게 사설을 늘어놓은 것도 다기에 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사진기에 관한 것일 겁니다.


저는 요즘 대형 사진기를 갖고 싶은 생각이 부쩍 듭니다. 예전에 하나 가지고 있다가 별로 쓰지 않는다고 팔았는데 이제 다시 가지고 싶으니 이것도 못 말리는 병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 8년 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일본 호스만에서 나온 호스만VH-R이라는 69판 사진기를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기는 중형 포맷으로 120롤 필름을 사용하는 것인데 주름상자가 달려 무브먼트가 가능하고 거리연동이 되는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기를 가보에서 산 뒤에 교환렌즈를 구하려다보니 무척 어려워 이것을 다시 가져다주고 아예 대형 포맷인 호스만FA45로 바꿨습니다.


이 FA45는 시트필름을 쓰는 기기로 생긴 모습은 독일의 그 유명한 린호프와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린호프보다 못한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내구성이나 정밀성에 떨어지는 것인데 그래도 다른 여타의 일제 대형사진기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지고 나가서 사진을 찍어보니 여름에는 검정색 천을 뒤집어 쓰고 찍자니 너무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고, 겨울에는 손이 시려서 다루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찍지는 못하고 늘 가방 속에 들어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제게 펜탁스645와 67이 다 있었으니 중형으로 찍는 것도 버거운데 무겁고 다루기 불편한 45판은 제게 부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두고 있다가 다른 것을 사겠다고 살 때의 반 가격으로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레인지파인더식 69판인 캄보69LX를 써보기도 했고, 테크니카형인 린흐프69도 써 봤지만 늘 아쉬움이 남기는 호스만FA45입니다. 크기나 무게에서 린호프69보다 오히려 더 작고 가벼운 느낌이었고 무브먼트기구도 훨씬 기능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솔직히 갖고 싶기야 린호프마스타테크니카45지만 그 사진기는 워낙 비싸서 엄두가 안 나고 그저 아쉬운 대로 호스만FA45입니다. 가끔 중고시장에 일본 도요45나 웨스타45가 비교적 저렴하게 나오고 있어 구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살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조금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호스만FA45입니다. 이 사진기를 구하면 정말 멋진 사진을 찍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시중에 찾아보니 깨끗한 중고가 더러 보이기는 하는데 가격이 너무 비쌉니다. 제 생각으론 다른 일제와 비교해 볼 때, 중고 깨끗한 것으로 사진기만 100만원정도면 맞을 것 같은데 대부분 150만원에서 180만원을 부르고 있어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진기를 100만원에 사더라도 렌즈가 30만원 정도 하니까 우선 130만원이 들어가야 하니 그 이상은 제게 무리입니다.


시대가 디지털시대라고 하지만 저는 디지털사진기보다는 이런 구닥다리를 좋아하니 시대에 뒤떨어진 것만큼은 틀림이 없지만 아날로그를 고수할 바엔 차라리 보다 더 큰 포맷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이런 병을 앓고 있으니 대체 누가 무슨 약으로 고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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