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9. 20. 19:01ㆍ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가을입니다.
아는 후배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제목의 글을 하나 부탁해 왔습니다. 조금 쉽게 생각하고 선뜻 승낙을 했는데 막상 이런 제목의 글을 쓴다는 것이 제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길을 떠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진기만 가지면 아무 생각 없이 떠나서도 하루를 잘 보낼 수 있고 사진 찍는 것에 빠지면 다른 진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졸지 않는다면 창 밖으로 눈을 돌려 혹 좋은 모습이 없는가 바라보는 것은 이미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이러니 진지하게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주제가 제게는 영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남이섬에 자주 갔었길래 그쪽에 갔던 얘기를 길게 썼습니다. A4용지 4장 분량으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예전에 썼던 글을 손보고 더 보태서 보냈더니 주제와 맞지 않는다고 다시 써달라고 왔습니다. 추석 연휴라 글을 쓸 시간은 많은 것 같았지만 여기 저기 돌아다녀야 할 일이 많아서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쓰기도 어렵고 또 예전에 갔던 얘기를 다시 되돌려 쓰려니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무거운 주제가 아니라면 경복궁에 다녀와서 써도 될 것 같은데 경복궁을 한나절 다녀와서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고 글을 쓰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풍기 부석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러잖아도 지난 여름 방학에 풍기에 갈 것인가, 아니면 구례에 갈 것인가 생각만 하고는 가지 못했는데 빨리 다녀오기는 부석사 쪽이 더 나을 것 같아 잠깐 다녀오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차례를 모시고 아침에 기차로 광천에 가서 성묘를 하고, 친척집 다섯 곳과 동네 어른 다섯 집을 찾아 뵙고, 친구집 세 곳을 들러 서울로 올라옵니다. 이것은 해마다 명절에 되풀이하는 여정인데 이번에도 예년처럼 했는데 추석 다음날에 광천에 사는 친구 집에서 모임이 있어, 추석날 밤에 올라왔다가 다음 날 다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자고서 오니 이미 토요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태풍이 우리 남해안을 쓸고 지나가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겨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어 부석사에 가기로 하고 사람을 모았습니다.
일요일 아침 다섯 시에 후배들 셋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북부간선도로를 타고 나가 태능으로 해서 중부고속도로로 들어갔다가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그리고 중앙고속도로를 타고서 풍기인터체인지를 거쳐 부석사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날이 생각한 만큼 맑지는 않았지만 그 쪽은 태풍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아 사진기를 들고 다녀도 낯이 뜨겁지는 않았습니다.
풍기에서 부석사로 가는 길가에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즐비한데 바람에 다 떨어졌을 것이라 걱정을 하며 갔더니 이쪽은 바람이 불지 않았는지 그런 피해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아 우선 마음이 놓였습니다. 작년에도 늦은 여름과 가을에 두 번을 왔던 길이라 길가의 모습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고 빨갛게 익어 가는 사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차를 멈추고 길가의 과수원과 사과들을 사진에 담고 싶었는데 다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냥 절까지 올라갔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올라가면서 저는 사진기를 꺼내 들었는데 배낭형 가방에 사진기를 넣어 왔더니 렌즈를 교환할 때마다 가방을 내려놓고 꺼내고 바꾸는 것이 아주 불편했습니다. 물론 배낭형 가방을 처음 메고 온 것은 아니지만 한 곳에 멈춰 서서 찍는 것이 아니고 이동하면서 찍을 때는 훨씬 더 불편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때는 배낭형 가방보다 어깨에 멘 채 렌즈를 넣고 빼낼 수 있는 가방이 좋습니다.
작년에 왔을 때는 645를 가져오기도 했고, 67을 가져오기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잡지사에 보낼 것이라 그냥 라이카와 그 렌즈들을 가져갔습니다.
부석사는 평지에 세워진 절이 아니고 경사진 언덕에 세워진 절이라 오르내리려면 힘이 들어서 가벼운 것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절이 크지는 않지만 언제 가도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절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형식은 덕산 수덕사와 비슷한데 절이 주는 분위기는 너무 달라서 신기하게 생각이 되곤 했습니다. 대부분 절들은 산 속에 있다해도 펀펀한 공간을 차지하고 서 있기 마련인데 부석사는 경사진 언덕을 따라 비스듬하게 세워져 마치 고개를 올라가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무량수전 위로는 올라가 보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건물이 두어 채가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덕사는 언제 가도 번잡스러워 보이고 화려한 건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있는데 여기 부석사는 화려하게 단장한 건물은 하나도 없고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건물도 많지 않아 무량수전 앞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다 한 눈에 들어오고 앞이 트인 것이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멀리 태백산맥의 연봉들이 아늑하게 보이고, 절 앞의 경사진 언덕은 그냥 휑하게 트인 것이 아니라 작은 산이 막고 있어서 짧은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절이 순천 선암사인데 거기도 화려하다기보다는 소박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작은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지만 옆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아래, 위로 늘어서 있어 갑갑한 느낌이 들지 않고 하나, 하나가 정겹게 느껴집니다.
저는 부석사에 다섯 번 째 온 것이지만 솔직히 무량수전 건물이 어쩌고 하는 것은 아직도 잘 모릅니다. 배흘림기둥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그게 저와 같은 문외한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기둥을 어루만지며 감탄하는 것도 우습고 그래서 그냥 어떻게 하면 사진에 잘 나올 수 있을 것인가가 전부입니다.
작년 가을에 왔을 때 처음으로 무량수전에 들어가 봤습니다.
처음에 놀란 것이 부처님이 중앙 정면에 있지 않고 좌측 측면에 안치되어 있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포단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입는 입상형식이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건물이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무척 넓었습니다. 마루도 나무가 아니라 돌을 깎아 깔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때 108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애들 입시 때문에 간절한 마음이라 50배가 조금 넘게 절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오면 꼭 108배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절을 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차가 막힐 까봐 서두르다보니 그랬는데 다음에 가면 꼭 108배를 하고 올 것입니다.
절에서 나와 바로 직행한 곳이 순흥에 있는 소수서원입니다. 여기는 부석사에서 풍기로 나오는 길목에 있어 찾아간다기보다는 오며가며 들릴 수 있는 곳입니다. 제가 도산서원에도 가봤지만 서원으로서의 풍모는 솔직히 여기 소수서원이 더 멋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30분간만 사진을 찍자고 한 것이 다들 빠져들어 한 시간을 넘게 지체했습니다. 고풍스런 분위기와 소나무, 내가 어울려 아주 멋들어진 모습이라 사진기를 꺼내들면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는 곳입니다.
서둘러 가자고 나오다가 주차장 앞에서 사과를 파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여기 사과가 아주 맛이 있어 조금 사려고 갔더니 대부분 상처를 입은 사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오려고 하니까 싸게 주신다면 3000원에 열 개가 넘는 사과를 담는 것입니다. 상처 나고 흠이 생긴 사과들이라 조금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샀는데 맛은 아주 좋았습니다.
솔직히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이 아니라 가을 구경을 하고 온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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