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남는다고 하는데

2003. 10. 25. 20:28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어떤 사람의 주소를 찾으려고 하다가 책상 밑에 있는 편지 묶음을 꺼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뒤적이다보니 20여 년 전에 받은 편지들이 보였습니다. 이젠 봉투도 편지도 누렇게 변색한 그 편지들을 몇 개 읽어보니 새삼 20여 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까맣게 잊었던 일이 생각나고, 그 편지 한 장 받기 위해서 제가 보낸 편지가 몇 통이었을까 하는 쑥스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그렇게 보관한 편지가 있기에 옛 생각에 젖어 볼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괜히 피곤해서 집으로 일찍 오고 싶었는데 집에 필름이 얼마 없어, 필름을 사러 충무로에 나갔습니다. 예전에 한번 나가면 열 롤 이상 필름을 사다놓고 썼기 때문에 필름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필름을 여러 롤 산다는 것이 두려울 만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한번에 다섯 롤 이상을 사지를 못합니다. 어제도 충무로에 나갔었는데 가진 돈이 여유가 없어 그냥 왔던 것입니다.


충무로 월드포토에서 120롤 필름 다섯 롤과 135롤 필름 다섯 롤을 샀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제일 비싼 필름을 썼는데 요즘은 아마추어용으로 나온 코닥 엘리트크롬을 쓰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코니카슬라이드를 주로 썼는데 필름을 너무 싼 것은 쓰는 것은 좋지 않다는 충고를 받고는 코닥 엘리트크롬으로 바꾼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 사진가도 엘리트크롬을 쓰고 있다길래 저도 전문작가가 아니면서 비싼 것을 쓰는 것은 사치인 것 같아 가격이 저렴한 것을 쓰기로 생각한 것입니다.

 

필름을 39,500원어치나 산 것은 올 들어 처음 있는 일이라 가슴이 뿌듯했는데 월드포토 미경씨가 그러잖아도 내 얘기를 했다면서 120필름을 넣을 수 있는 파일이, 괜찮은 것인데 끝이 말려서 팔 수가 없다고 가져다 쓰시면 어떻겠냐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집에 가져와서 그 동안 여기 저기 대봉투에 넣어서 쌓아 두었던 필름을 꺼내어 파일에 정리해 봤습니다.
제가 중형 사진기를 처음 가진 것은 1989년 쯤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것이 '마미야645프로'였는데 가보카메라에서 80만원에 주시어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200mm, 45mm 등의 렌즈를 갖춰서 쓰다가 1992년에 펜탁스645로 바꿨고, 그 2년 뒤에 펜탁스67도 구입하여 오랜 시간을 645와 67을 같이 가지고 썼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에 645를 정리하여 지금은 67만 쓰고 있는데 이 중형 사진기들로 찍은 사진이 수 백 롤이 넘습니다. 거의 대부분을 슬라이드필름으로 찍었는데 뭐 좀 알고 찍은 사진도 있지만 그냥 아무 것도 모를 때에 찍은 것도 많습니다. 135네가 필름으로 찍은 사진과 필름은 수도 없이 많이 버렸지만 슬라이드 120롤 필름은 버린 것이 거의 없어 무척 많은 양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 여기 저기 쌓여 있었는데 오늘 그 필름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서너 시간을 거기에 매달렸는데 반도 정리하지 못하고 남은 것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루하기도 하고 필름을 눈으로 드려다 보려니까 힘도 들어서 더 이상 계속 하다가는 짜증스럽기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필름이 한 컷씩 잘려서 있었다면 더 간단할 것인데 645는 3-4장씩 붙은 채로 되어 있고, 67은 두 장씩 붙은 채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것도 버리기가 아까워 그냥 종이 봉투에 넣어서 보관을 해왔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것만 골라서 두고 잘 나오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버린다고 들었는데 저는 잘 나오지 않은 것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그냥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도 중복되거나 잘 나오지 않은 필름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고르다보니 남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37컷 한 롤에서 한두 장 건지면 성공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한번 나가서 한 장이라도 건진다면 성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엔 나가서 찍은 필름이나 사진을 볼 때, 아까워서만이 아니라 다 좋아 보여서 버리지 못하고 그냥 다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나가서 찍은 필름 중에 반 정도는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필름을 보니 버릴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백령도에 가서 찍은 사진 중에 645로 찍은 것은 열 롤을 다 버렸고, 67로 찍은 것도 3롤 중에 두 컷만 남기고 다 버렸습니다. 덕유산에 가서 찍은 것 3롤, 제주도에 가서 찍은 것 7롤을 다 버리려니까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거기 다녀온 흔적인데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면 갔다가 온 흔적조차 없애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조금 안 나왔어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자기가 만든 도자기들을 망치로 깨는 것을 생각하면서 제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없애버려야 다시 가서 찍을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사실 어떤 곳은 다시 가기가 싶지 않은 곳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안된 사진을 가지고 거기 다녀왔다고 얘기하는 것은 더 우스울 것 같아, 아예 없애 버린 것입니다.


중형사진기는 더 무겁고 삼각대도 더 큰 것을 가지고 가야하기 때문에 길을 나설 때는 많이 망설여집니다. 그런데도 중형을 가지고 가는 이유는 더 좋은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물론 중형사진기로 찍는다고 더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같은 사진을 찍었을 때, 중형으로 찍은 것이 확대할 때 더 좋다고 합니다.


사진기가 많으면 밖에 나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때문에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기, 저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다보면 무엇 하나 확실하게 다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나만 가지고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사진을 찍는 지름길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하늘 공원에 가서 찍은 사진 몇 컷이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와서 흡족했는데 이것은 결과를 예상하고 찍은 것이 아니라 그냥 찍어 본 것이 잘 나온 것입니다. 가끔은 그런 예기치 못한 수확을 거둘 때도 있지만 그런 요행이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저는 내일 새벽에 다시 청평호반으로 나갑니다.
펜탁스67을 가지고 가는데 날이 좋기를 바라면서 이번에는 제대로 찍은 사진이 한 컷이라도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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