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마음, 소인의 마음

2003. 11. 3. 21:27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늘 중심을 잡지 못하는 가벼운 마음은 남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건방진 조언을 자주 하면서 제 스스로는 갈대처럼 흔들립니다. 이런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럽지만 또 다시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쓰지도 않으면서 좋다는 사진기를 보고 들으면 꼭 사고 싶어하는 마음은 언제나 고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봄에 갑자기 사진기를 정리하고자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쓰지 않던 캐논 T90을 정리했습니다. 살 때에 싸게 샀기에 거기서 조금 빼고 더 싸게 내어놓았더니 내어놓자마자 팔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 너무 싸게 팔았다는 생각에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싸게 샀던 것은 가보카메라 회장님이 저를 생각해서 싸게 준 것인데 거기서 더 싸게 팔았으니 제 것을 산 사람은 그야말로 횡재를 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싸게 사가고 나서도 제가 주겠다고 한 어댑터를 주지 않았다고 메일을 몇 번씩 보내어 언짢게 한 것을 생각하면서 저도 앞으로는 좀더 냉정하게 사고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T90을 팔고 나니 거기에 쓰던 탐론렌즈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진기만 하나 있으면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펜탁스에 쓰고 있는 탐론렌즈가 70-210mm, 70-150mm, 35-70mm, 350mm 등이 있어, 렌즈를 따로 구입하지 않아도 바디만 하나 있으면 도로 다 쓸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역시 캐논 T90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이 제게 딱 맞는 말인데 마침 가보카메라에 아주 깨끗한 T90이 하나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40만원에 구입하고 보니, 캐논 L렌즈를 하나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FD 20-35mm f/3.5 L렌즈를 하나 구했습니다. 거금 65만원을 주고 샀는데 이 렌즈는 충무로 일출카메라에서 75만원을 달라는 것을 충무양행에서 10만원 싸게 산 것입니다.


그리고 남대문상가를 지나다가 아주 작은 가게에서 T90의 전용 플래시인 TL300을 보고 15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제가 전에 것은 10만원에 팔았는데 제가 쓰던 것보다 더 깨끗해서 두말 않고 샀습니다. 펜탁스 수동 사진기에 쓰려고 샀던 탐론 SP 90mm f/2.5마크로 렌즈도 아답톨을 구해서 T90에 쓸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렌즈는 22만원에 산 것인데 겉은 조금 사용흔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구하다보니 캐논 FD아답톨을 넷이나 가지게 되어 어디 나갈 때는 완벽하게 한 세트를 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입해서 쓰다보니 펜탁스 Z-1P와 겹치는 것이었습니다. 펜탁스의 자동초점인 Z-1P에 딸린 렌즈가 20-35mm f/4.0 AL, 35-135mm f/3.5-4.5, 200mm f/2.8, 300mm f/4.5 등이 있어 둘의 화각이 겹치다보니 둘 중의 하나는 늘 쉬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번에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가면서 T90세트를 가져가려고 생각하니 애들 찍어 줄 다른 사진기가 하나 더 있어야겠는데 사진기를 두 대 가져가면 렌즈호환의 문제 때문에 아무래도 펜탁스를 가져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20-35mm, 35-135mm, 200mm, 300mm에 펜탁스 Z-1P, Z-20을 가져갔습니다. 1P에는 슬라이드를 넣고, 20에는 그냥 컬러필름을 넣어 두 대를 메고 다니며 제 사진도 찍고 애들도 찍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아주 편리했습니다.


제주도에 다녀와서 생각하니 캐논 T90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은 발 빠르게 다 디지털로 옮겨가고 있는데 저만 옛날 사진기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 같아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처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다 팔면 130만원 정도는 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디 35만원, 20-35렌즈 60만원, 탐론 마크로 90mm 20만원, 플래시 15만원은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는 사진기 점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렇게 받기는 힘들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아주 최상품이라야 그 정도 받을 것인데 요즘 그렇게 깨끗한 것은 볼 수가 없다고 하길래 제가 한번 팔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캐논메뉴얼클럽 장터에 사진기 40만원, 20-35렌즈 63만원, 마이크로렌즈 20만원, 플래시 15만원에 내어놓았습니다. 팔리면 좋고 정 팔리지 않는다면 다시 쓰면 되는 것이고, 또 꼭 팔 생각이 든다면 조금 더 손해를 보더라도 아는 점포에 가져다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까 부담스러울 것도 없고 조급해할 이유가 없어 좋았습니다.


게시판에 올릴 때 이틀만 게시하겠다고 단서를 달았고, 메일로만 연락을 할 것과 직거래를 원칙으로 한다는 것을 명시했더니 바로 메일이 왔습니다. 사진기를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지만 플래시와 마이크로렌즈는 두 사람, 세 사람이 겹쳐서 왔고 20-35렌즈도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선 순위를 정해 차례로 연락을 하여 플래시와 마이크로렌즈는 쉽게 팔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이크로렌즈를 우선 순위로 예약을 하더니, 렌즈의 성능이 어떠하냐, 접사를 할 때에 경통이 밖으로 나오느냐 등을 묻길래 속으로 참 답답했습니다. 렌즈의 성능이 캐논 오리지널만큼 하다면 가격이 반밖에 안 할 까닭이 없고, 경통이 안으로 도는 것은 최신형 자동초점에서나 가능한데 그런 렌즈가 겨우 20만원밖에 안 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학교로 전화가 오더니 밤 늦게 집으로까지 전화를 해서 좀 짜증스러웠습니다. 아마 학교 상황실로 전화를 해서 제 집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해약을 했고 다음 분이 사갔습니다.


이번 거래를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웠던 일이 하나 있어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20-35렌즈를 구입하겠다는 분이 청주에 계시다고 하는데 입금을 하면 렌즈를 우송하겠다고 했더니, 렌즈를 택배로 보내고 운송장 번호를 알려주면 돈을 송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오전에 우체국 빠른 등기로 부치고 전화를 했더니 등기부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길래 알려줬습니다. 그랬더니 토요일이라 은행이 안 할 것이라면서 텔레뱅킹을 하지 않아서 월요일에나 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물건을 보내고 그 번호까지 알려 줬는데 조금 찜찜했습니다.


등기번호를 알고 있으니 중간에서 우체국에 전화를 해서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대고 찾는다면 그것도 가능할 것 같고, 주소가 있다해도 유령주소를 이용해서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잘못 보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고, 혹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고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먹었더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오전 중에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제가 먼저 전화를 해서 물었다가 정말 사기를 당했다면 더 속이 상할 것 같아 오늘 하루를 기다려보기로 하고는 깜빡 잊고 지냈습니다.


점심을 먹고 졸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저를 찾길래 받았더니 렌즈를 사신 분이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니까 렌즈가 와 있다면서 송금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의심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늘 내가 남을 믿는데 남이 왜 나를 믿지 않겠냐고 얘기하면서도 남을 의심했다는 것이 낯뜨거운 일이었습니다.


군자의 마음으로 보면 다 군자이고, 소인의 마음으로 보면 다 소인이라는데 저는 렌즈 하나 때문에 소인이 됬던 것입니다. 인터넷 매매가 사기가 많다고 하는 얘기 때문에 저도 그런 걱정을 했던 것이지만, 저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반성하고 플래시를 산 진병욱 님, 마이크로렌즈를 산 이현승 님, 20-35렌즈를 사신 청주시청의 홍왕표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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