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1. 8. 22:05ㆍ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우리 속담에 꿩 대신 닭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닭 대신 봉이라는 말도 있는 것을 보면 닭이 언제나 제일 아래 취급을 받은 것 같은데 그래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는 얘기가 있으니 예전에는 오리보다는 낫게 취급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리 잡아먹고 닭발을 내밀지언정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나간 주에 캐논 T90을 모두 정리하고는 그 돈으로 호스만 45FA를 사려고 했습니다.
가보카메라에 호스만이 있었다면 언제든지 가져왔겠지만 요즘 여러 군데를 돌아봐도 그 사진기가 흔하지 않습니다. 충무로 21세기에서는 180만원, 남대문 대광사에서는 190만원을 달라고 하던데 둘 다 신품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렇게 비싸게는 살 필요도 없고, 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싼 것을 찾아다니다가 충무로 대진월드에서 150만원을 달라는 것을 하나 보았습니다. 상태가 90% 정도라고 하는데 150만원 이하로는 안 된다고 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캐논을 팔아 만든 돈이 135만원인데 사진기를 150만원에 사고 게다가 렌즈를 하나 구입하게 되면 최하 20만원이 더 들어가니 노출계는 나중으로 미룬다고 하더라도 당장 35만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어서 많이 망설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40만원은 너끈히 받을 줄 알았던 T90바디가 무슨 이상이 있다고 하면서 20만원을 보길래, 그대로 가보에 갔다가 주었기 때문에 35만원은 현금으로 들어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T90은 아무리 봐도 이상이 없는 아주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가보에 갔다가 주면서 당장 현찰을 달라고 할 수가 없어, 가보에 5.6/150 아포 짐마렌즈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20만원에 가져오기로 했는데 그렇게 해도 50만원 가까이를 카드로 지불할 수밖에 없어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던 중에 사진기 문제로 제가 자주 자문을 구하는 최구조 님과 상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굳이 린호프를 사려고 하지 말고 일제 중에서도 가격이 저렴한 위스타45필드나 도요45필드를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사진기는 성능에 비해서 가격이 저렴하니, 저렴하게 구해서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며, 대부분 사람들이 겉멋으로 린호프를 쓰는데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보니 굳이 일제 사진기를 쓰면서 호스만45FA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가장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비싸게 살 필요가 없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사진연감 2003년도 판을 찾아봤더니 호스만45FA가 35만엔, 위스타45SP가 33만엔, 도요45AⅡ가 23만엔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호스만45FA를 사기 위해 무리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진기점 홈페이지를 검색해 봤습니다.
그런데 위스타는 거의 없고 도요45A만 여기 저기 눈에 띄는데 가격이 보통 중고로 60-80만원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 가격이면 큰 부담이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었고, 이왕이면 호스만45FA와 큰 차이가 없는(가격에서) 위스타45SP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포토빌이란 사이트에서 매물로 나왔던 위스타45SP가 생각나서 그 사이트를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포토빌은 아주 많은 사진기와 렌즈, 액세서리가 매물로 나오는 곳인데 주로 사진관을 운영하는 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라 대형사진기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그 사이트를 눈이 아프게 뒤져보다가 문득 팔렸으면 다 허망한 일이다 싶어 거래가 완료된 물품목록을 찾아봤더니 거기엔 위스타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다시 찾았더니 무려 70쪽을 지나서 지난 8월, 초에 매물로 나와 있던 위스타45SP가 거기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연락처로 전화를 해서 물었더니 아직 팔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서 보기로 하고 시간을 정했습니다.
위스타45SP에 슈나이더 아포 짐마렌즈 5.6/150을 장착해서 70만원이라고 하니 가격은 아주 흡족했으나 상태가 어떠한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1월 8일 오후 2시에 가보앞에 있는 아미고라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을 지키어 나가보니 약속한 사람이 나와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길이 막혀 30분 정도 늦어질 것이라고 하길래 가보에 와서 기다렸습니다.
가보카메라에 있는 미놀타 스포트메타F를 28만원에 제가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거기 있는 5.6/150렌즈를 20만원에 가져올 생각이었으나 렌즈가 장착되어 있다니까 필요가 없어져서 노출계로 가져올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청춘남녀 한쌍이 들어오더니 진열장에 놓여 있는 롤라이35SE를 사려는지 가격을 물어왔습니다. 30만원이라고 하는데 롤라이35S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깨끗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기를 사려는 여자와 같이 온 남자가 우리 학교 졸업생이었습니다. 이 녀석은 지금 경일대학교 사진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인사를 하는데 돈이 부족한지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서 갔습니다.
그 팀이 가고 조금 있으니까 이번에는 펜탁스클럽에서 알고 지내는 이성주 님이 제가 가보에 있는 것을 보고 인사차 들렀는데, 그 롤라이35SE를 보고는 마음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성주 님과 커피숍 아미고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성주 님은 펜탁스645를 사려고 돈을 준비중인데 그 깨끗한 롤라이35SE를 보니까 자꾸 마음이 움직인다고 고민하더니 결국 가서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으려 레버를 돌리다보니 이상이 있다고 가서 물러왔습니다.
저는 기다리던 분이 사진기를 가지고 왔는데 조금 험하게 사용한 흔적이 있어 썩 마음에 들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보카메라로 가서 최구조 님을 전화로 오시게 해서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전문가답게 여러 모로 차근차근 살펴보더니 아주 쓸만한 기기라고 사는 것이 좋겠다는 판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위스타45SP에 아포 짐마 렌즈 5.6/150를 장착하여 70만원에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놀타 스포트메타F 노출계를 28만원에 구입한 것입니다.
제가 사진기를 사는 동안 최구조 님이 롤라이35SE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잠깐이면 손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뜯더니 아주 쉽게 고장난 부분을 찾아 수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런 것인지 수리가 끝나자마자 낮에 왔던 제자와 여자친구가 그 사진기를 사러 왔다고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진기를 사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진기도 서로 인연이 닿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성주 님이 이 얘기를 들으면 아까운 것 놓쳤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고, 괜히 마음이 움직여 곤란했는데 팔렸으니 잘 되었다. 고 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인 것이 제가 만약 호스만45FA를 150(렌즈까지 하면 170만원)만원에 샀는데 그와 비슷한 위스타45SP를 다른 사람이 70만원에 샀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저는 꿩 대신 닭을 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은 닭 대신 봉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사진기가 사고 싶어 이것을 다시 팔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밤 잠을 이루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갖고 싶던 45필드사진기를 저렴하게 구했으니 이 흐뭇함 때문에 많은 시간을 뒤척일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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