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1. 17. 15:22ㆍ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사진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사진가를 소재로 다룬 소설을 보면 더 관심이 갑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는 고전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다보니 현대 소설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소설가 중에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 님이 사진에도 조예가 많고 관심이 깊다고 들었고, 천금성 님도 사진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윤대녕 이라고 하는 젊은 소설가가 쓴 "은어낚시 통신"이란 소설에는 미국의 에드워드 커티스의 사진 얘기가 나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인데 엊그제 박성원 님이 쓴 "댈러웨이의 창"이라는 소설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댈러웨이는 사진가라고 나와 있기는 한데 실제로 존재한 인물인지도 확실치 않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일에 가려진 인물인 것 같기도 하고, 가공의 인물 같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찾을 수 있다는 엠파스에 들어가서 찾아보았지만 제가 본 소설 제목만 나와 있고 정작 댈러웨이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댈러웨이는 죽기 전까지는 사진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작품도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명확하지 않아서, 실제 인물인지도 의문이 간다는 얘기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진을 인화하고 난 후에 필름을 스스로 태워 없앴기 때문에 그가 찍은 필름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답니다. 주로 정물화 같은 사진을 찍었는데 그 정물화 같은 사진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그 사진 속 어딘가에 또 다른 모습이 들어 있어, 그냥 보고 지나치면 그 사진의 진가를 알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소설의 내용이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런 특이한 작가가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 특이해서 자세히 읽었습니다. 댈러웨이의 사진에는 사진 안에 있는 거울이나, 그릇 등에 사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답니다. 심지어 사진 속의 웃는 사람의 안경 속에 비친 다른 모습이 그 사진의 주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평화롭게 보이는 식탁이 있고 사람이 없어, 잠깐 차려 놓고 자리를 비운 것 같이 보이는 사진 속에, 식탁위에 놓여 있는 스푼을 자세히 보면 무언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것을 확대하면 그 안에는 한 군인이 농부를 총으로 살해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댈러웨이는 그 사진을 유고내전 당시에 실제로 찍었는데 그는 그 순간에도 슬라브족 민간인을 학살하는 정부군의 사진을 직접 찍기 보다 반사되는 물체에 담아서 찍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는 두번 다시 식탁의주인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또 막연히 평화롭고 한가롭게만 보이던 어느 농가의 식탁은 사실 죽음의 만찬과 같다는 공포감을 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보면 사진 속의 모습과 전혀 다른 세계가 보여 댈러웨이의 사진이 다시 평가를 받았고 그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는데 댈러웨이는 그런 평가를 받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댈러웨이가 남겼다는 말, 창은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만일 창이 없다면 사각의 벽 속에 갇혀 있는 진실을 어찌 구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마지막 사진작품에 '미지의 창'이라는 제목을 사람들이 붙였나 봅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미지의 창'은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직 아무도 해독해 내지 못해서 그 영상을 제대로 찾아내면 100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는 현상이 붙어 많은 사진인들이 그것을 찾고자 혈안이 되었는데 사진 자체가 귀해서 구할 수가 없다는 얘기도 나와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사진을 한 장만 인화를 하고 필름을 다 태워 없앴다면 그 인화된 사진을 다시 찍어서 인화를 할 수밖에 없을 텐데 어디서 쉽게 구하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든, 그냥 허구의 소설이든,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댈러웨이라는 사진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야 뭐 사진가 운운하는 것이 낯뜨거운 그냥 사진인이지만, 이런 제가 찍은 사진도 필름을 다 보관하고, 또 같은 사진을 여러 장 인화해서 이 사람도 주고 저 사람도 주었는데 사진이란 아무리 복사가 가능한 것이라 해도 두 장 이상 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옳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우습게 아는 것도 무제한의 인화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목숨 걸고 다니며 찍은 사진을 그냥 쉽게 인화하고, 또 그것을 별 생각 없이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보이는 부분만 찍는 것이 사진이라 생각하는데 보이지 않는, 아니 남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심혈을 기울여야 알아 볼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저만이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 생각을 많이 하고, 남들이 편하게 쉴 때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찍기 위해 나가는데 댈러웨이는 그런 저보다 몇 단계 위의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하니 전율을 느낍니다.
어떤 살인자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고 할 때, 그 살인자의 표정에서 볼 수 없는 고뇌의 마음이든, 복수의 환희에 벅찬 얼굴이든, 이런 것이 죽어 가는 사람의 눈동자에 찍혔다던가 그가 휘두르는 칼에 비쳐져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영상을 잡아 낼 수가 있을 것인지, 또 그렇게 잡아내려면 어떻게 찍어내야 하는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댈러웨이의 사진을 어떻게든 보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회원 여러분은 이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설이란 자체는 물론 허구입니다.
문학이 허구라고 할 때에 가장 앞에 서는 것이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설이 소설로서 살아남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허구라 할지라도 사람의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누구도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인데 실제로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그것을 읽으며 거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그 댈러웨이에게 집착하는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사진으로 과연 그렇게 찍어 낼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남습니다. 그래서 단 한 장만이라도 댈러웨이의 사진이 보고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저도 그런 사진을 찍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기에 그런 얘기가 소설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오후에 경복궁에 갑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4*5필름으로 찍어 볼 생각입니다. 렌즈가 150mm 하나 밖에 없어서 조금 아쉽지만, 그리고 슬라이드가 아니고 네가 필름이라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이미 필름홀더에 장착해 놓았으니 찍어야겠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대형사진기라 조금 걸리긴 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형사진기를 펴놓고 시간을 끌다보면 욕도 먹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나가서 찍을 생각입니다.
댈러웨이가 찍은 사진을 흉내낼 수는 없지만 오늘은 으젠느 앗제를 생각하면 그가 찍은 사진을 흉내내고 싶습니다. 파리의 공기를 느끼게 한다는 앗제의 사진, 저는 오늘 조선왕조를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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