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방황 그리고 갈등의 끝

2003. 12. 11. 13:49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갈등에서 벗어났습니다.
한동안 디지털사진기를 사겠다고 많은 갈등과 번뇌를 느꼈는데 이제 그 갈등에서 벗어났습니다. 디지털사진기에 대한 생각을 접은 것입니다. 너무 쉽게 변하는 마음이라 저도 창피스럽지만 제가 잘못 이해를 하고 덤벼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디지털사진기를 부러워한 것은 작고 가벼워서 아무데서나 꺼내어 찍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사진기들은 다 부피가 큰데다가 플래시가 장착되지 않은 것들이어서 저녁에나 실내에서는 꺼내어 찍으려면 아주 불편한데 디지털사진기들은 어디서나 쉽게 꺼내어 찍는 것을 보고는 그 편리함에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 마음으로 살펴보니까 더 나은 것으로 자꾸 눈이 가고 그러다 보면 다시 부피가 커져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전자수첩 만한 것은 마음에 차질 않았습니다. 10배 줌렌즈가 장착된 것들이 사고 싶어지는데 그렇다면 제가 가진 필름사진기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저는 그냥 찍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사진을 찍은 뒤에 다시 보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포토샵을 해야한다는데 그런 것을 하면서 까지 디지털사진기를 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포토샵을 할 것 같으면 차라리 흑백필름으로 찍어서 제가 사진을 만드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디지털사진기를 사겠다는 생각을 이제 접게 된 것입니다.
제가 가졌다가 내어 놓은 사진기 중에서 다시 간절하게 갖고 싶은 것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코니카에서 나온 오토레코드라고 하는 하프사이즈 판의 자동초점 사진기인데 이 사진기를 10만원에 샀다가 10만원에 되팔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쉽습니다. 이 사진기는 정말 전자수첩만큼 작습니다. 그러니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아무거나 막 찍을 수 있었는데 그냥 팔아버린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리코에서 나온 R1콤팩트사진기입니다. 이 사진기도 크기는 전자수첩보다 조금 더 크지만 24mm와 35mm 두얼렌즈로 되어 있어 가지고 다니면서 기록적인 것을 찍기엔 아주 편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진기를 살 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진기만 있다면 굳이 디지털사진기가 필요 없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야후 경매에서 미놀타 28-70mm 줌렌즈가 장착된 콤팩트사진기가 올라 있는 것이 보이기에 낙찰을 받았습니다. 8만원에 구입을 했는데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중국제라는 것이지만 그런대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찍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아 안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진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사진기와 렌즈를 사고, 팔고 다시 구입해서 만지는 재미는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사진기를 어른들의 장난감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는데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잘 만들어진 사진기는 그 자체로도 만족감을 갖게 합니다.


며칠 전에 가보카메라에 갔더니 여의도에 사시는 김사장님이라는 분이 제게 LX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 왜 그 좋은 사진기를 없앴냐고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일제에서 니콘과 캐논만 쓰지만 LX가 아주 좋은 기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펜탁스를 다 없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펜탁스 팬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LX를 처분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펜탁스에서 나온 LX라는 사진기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던 1988년도에 LX를 구입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래 썼고, 그 사진기가 니콘의 F3, 캐논의 뉴 F-1보다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펜탁스클럽이 있으니까 그런 기종이 있다는 것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제가 처음 살 때는 그런 기종이 있다는 것을 아는 샾도 드물었고, 대부분 이름만 들어봤지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극히 적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기기를 순간의 판단착오로 마운트를 라이카 R마운트로 개조를 했고 그렇게 쓰다가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샀다가 팔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차라리 펜탁스 K2DMD가 더 제 손에 맞고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펜탁스 자동초점형식으로 Z-20과 Z-1P를 가지고 있고, 수동초점형식으로 K2DMD가 제 손에 있어 더 이상 펜탁스 사진기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자주 LX를 얘기하니까 그게 없다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사지 않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 사진기를 사려던 돈이 굳어져서 다시 LX를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성능과 상태를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사진기를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더 이상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엊그제 일요일에 경복궁으로 서울포토클럽과 사사사 회원들이 함께 촬영을 갔는데 거기 나온 종린이 형님이, 놀랍게도 펜탁스 Z-1P와 MZ-S를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형님은 아직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는데 관심은 누구보다도 많아 그런 장비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더러 '형님 사진기는 두 대면 충분하니 형님이 가진 LX는 저나 주세요'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를 했더니 그러라고 쾌히 승낙을 하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그렇게 얘기가 돼서 다시 LX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제 것이 되겠지요. K2DMD가 있어도 별로 쓰는 일은 없었는데 LX가 온다고 더 쓸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흐뭇한 일일 것 같습니다. 오래된 사진기는 시간이 갈수록 품위가 느껴지는데 요즘 디지털사진기는 새 기종이 나오면 먼저 기종은 거의 폐품으로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덜 끌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디지털사진기가 처음 나올 때는 사진의 질이 떨어진다고 했지만 지금은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저도 디지털사진기로 찍은 사진이 필름으로 찍은 사진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좋은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나 그렇지 않은 싸구려 사진기로 찍은 사진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무슨 사진을 제가 구별할 줄 안다고 좋다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아직은 디지털사진기가 정이 가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제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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