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 18. 19:39ㆍ사람과 사진과 사진기/사진기와 렌즈
제가 가진 135 SLR사진기가 여섯 대 입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잘 알고 지내는 지인 한 분이 제게 펜탁스 LX사진기를 하나 주셨는데 제가 갖고 싶었던 것만큼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더 손을 대서 깨끗이 한다면 많은 돈이 추가 될 것 같아 그냥 쓰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파인더만 바꾸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파인더가 장터를 통해서 나오는 것도 20만원이 넘어가니 그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정말 낭비인 것 같아 손을 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 지인이 해외여행을 가시면서 자동초점 사진기를 하나 달라기에 제가 네거필름을 넣고 쓰는 펜탁스 Z-20을 드렸습니다. 그 사진기를 살 때도 장터에서 너무 싸게 나왔길래 14만원에 산 것인데 아주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들어서 일반 촬영에는 늘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기가 없으니 많이 아쉬웠는데 엊그제 펜탁스 장터에 보니 13만원에 나온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상태는 A급이라고 하길래 제가 쓰려고 사겠다는 예약을 했습니다. 강남역에서 만나자고 한 것을 제가 양재동에 가서 헤매다가 한참 뒤에 만났으니 상태를 보고 말고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사진기 상면에 작은 흠들이 여러 개 있는데 깊은 것은 아니지만 플라스틱 바디라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싼 맛에 사기로 했습니다.
돈을 건네주었더니 사진기에 펜탁스 28-80/3.5-4.7렌즈까지 장착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사진기 몸체만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렌즈까지 주는 것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렌즈가 타이완에서 나온 것이고 줌잉 조절장치가 고장나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SMC-FA 정품 렌즈인데 어디 가면 5만원이야 못 받겠습니까?
아주 흐뭇한 마음으로 가져 왔습니다. 렌즈는 제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누구라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좋았는데 바디 캡과 렌즈 뒤 캡이 없어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렌즈도 처음엔 오리지널 펜탁스인 줄 알았는데 타이완제여서 조금 그랬지만 가보에 가져다 주면 쓸만한 가방이라도 하나 가져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경복궁에 갔습니다.
제가 다음카페에서 운영하는 사람과 사진과 사진기라는 사진 취미 카페가 있는데 거기 회원들과 번개 모임으로 한 것입니다. 경복궁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그 시간 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사진기를 꺼내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근정전 안의 모습만 두어 컷 찍고는 경회루를 거쳐 향원정 앞 매점에서 두어 시간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엊그제 구입한 코니카 레비오 510K 디지털 사진기를 가지고 오신 분, 니콘 F5, 캐논 EOS5, 펜탁스 MZ-S, 펜탁스 Z-5P, 그리고 저는 펜탁스 LX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 사진기, 저 사진기를 들고서 초점도 잡아보고 그립감도 느껴보고 하면서 사진기와 렌즈에 관한 여러 얘기를 나누었는데 단연 마음에 드는 것은 니콘 F5였습니다. 가격 면에서도 다른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얘기로만 듣다가 손에 잡아보니 정말 가지고 싶어할 명기였습니다. 손에 잡히는 착용감, 파인더로 보이는 사물, 자동 초점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들이 다른 것들과는 한 차원 달랐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앞으로 필름을 쓰는 사진기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30년 정도 될 것이니 설마 30년 안에 필름이 단종될 것인가 하는 기대를 얘기했는데 같이 참석한 분 중에 디지털을 쓰는 정배 님은 필름 사진기가 앞으로 5년 뒤에는 골동품이 될 것이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필름이 나온다 하더라도 무척 비싸질 것이며 편리성이나 가격면에서 디지털사진기에 밀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 말씀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제가 가진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똑딱이 사진기가 5개, SLR사진기가 6개인데 이런 것들을 그냥 가지고 있다가 정말 고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오기 전에 빨리 처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 필름 사진기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있나 봅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가격 하락이 정말 놀라울 정도인데 그냥 가지고 있다가 손해를 보느니 더 손해를 보기 전에 팔자고 다 내어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더 현명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급 사진기 생산 라인이 다 없어 져서 더 이상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들을 처분하기는 더 아까울 것 같습니다. 살 때는 다 비싸게 샀는데 그것들을 아주 싸게 내어 놓는다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고, 남들 다 그런다고 덩달아 그러는 것은 부화뇌동인 것 같아 저는 그냥 가지고 있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아야 되겠지만 가진 것을 파는 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 골동품이 되고 고철이 된다해도 제가 가진 것들은 제가 끝까지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손해보지 않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멍청하고 미련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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