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로트와 몽블랑

2001. 11. 25. 11:32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저는 볼펜 글씨를 못 씁니다.
어려서 잘못 된 습관으로 펜을 잡으면 힘이 들어가 볼펜으로 쓰면 액이 흘러나와 아주 지저분해집니다. 그리고 세라믹 펜으로 쓸 때도 힘이 들어가서 한참 쓰면 펜 끝의 볼이 빠져 나갑니다. 그래서 요즘은 탱크펜이라는 것으로 주로 쓰는데 이것도 반 정도 쓰면 진하게 흘러 나와서 늘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가끔 만년필을 사용하고자 하는데 이것도 펜 끝이 갈라지는 기분이 들어서 무척 조심스럽게 씁니다. 국산 만년필도 가격이 무척 높아졌습니다. 좀 무게있게 만든 것은 10만원을 훌쩍 넘어 갑니다. 저는 한동안 만년필하면 파카가 제일 좋은 것인줄 알았습니다. 아마 파카는 50만원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전에 중학교 때부터 파카 만년필은 무척 고급으로 알았고, 어떤 친구가 아버지 것을 몰래 가져다 파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가 한 반에 하나 있을까 였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나이 먹어서 들으니 몽블랑이라는 프랑스 만년필 앞에서는 파카가 명함을 내밀지도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는 분에게 들으니 250만원하는 몽블랑을 가지고 있다고... 저명 인사들이 싸인할 때는 대부분 몽블랑으로 한다고 합니다. 각 국의 대통령이나 유명한 사람들은 기본으로 몽블랑을 쓴다고... 저는 10여 전에 졸업하는 학생이 선물이라고 몽블랑 볼펜을 가져왔는데 그 때는 전혀 모를 때라 후배에게 줬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볼펜 조차도 엄청난 고가이고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제가 가입해 있는 펜탁스클럽 게시판에 어떤 분이 글을 올리기를 '좋은 사진기와 렌즈를 쓰려거든 니콘이나 캐논으로 하라'고 점잖게 충고를 했습니다. 아마 그 분이 알기로는 니콘이나 캐논이면 펜탁스보다 한참 위인 것으로 봅니다. 하긴 니콘이면 사진기에서도 널리 알려진 명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우선 사진기만 해도 니콘 F, F2, F3, F4, F5 정도면 가격도 비싸거니와 품위 있어 보이고, 렌즈도 다른 일제보다는 조금 더 비쌉니다. 니콘을 살 돈이면 펜탁스를 세트로 구비할 만큼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지도에서도 니콘이 펜탁스보다는 휠씬 위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느 학부형을 만나고는 이런 얘기들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나 애들 사이에 내가 사진을 좀 찍는다고 알려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학교에 출근할 때든, 소풍이든, 무슨 날이든 간에 항상 사진기를 가지고 다닙니다. 렌즈 두세 개에 바디 두 개 정도를 가방에 넣어 어디든 제가 가는 곳이면 가지고 다닙니다. 그러다보니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자기 어머니가 사진을 배운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 국어 선생도 사진을 잘 찍는다고 소문이 났다는 얘기를 했나봅니다.


그 어머니가 학교에 일이 있어 왔다가 저더러 사진을 하느냐고 묻길래 그저 취미로 조금 한다고 대답했다니, 자기도 사진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 하길래 혹 무슨 도움이라도 될까 하고 사진기와 렌즈를 물었더니 놀랄 답이 나왔습니다.


라이카 R8에 35mm f/1.4, 60mm 마크로, 100mm 아포 마크로, 180mm 2.0 아포 등 줄 잡아 돈 천만원 가까이 되는 장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놀라 그렇게 비싼 것들을 누가 사라고 하더냐고 물었더니 사진 강좌 강사가 이왕 하려거든 라이카를 사야된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력이 있는 사람이 비싼 거 사는 거야 누가 뭐라하겠습니까마는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그런 장비를 권하는 전문가라는 강사가 참 한심스러웠습니다.


펜탁스 클럽에 가보면 20만원하는 렌즈가 비싸서 마음을 졸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냥 쉽게 라이카를 사서 배운다니 이거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종로에서 사진기점을 하는 우리 회장님 말씀이, 요즘 같이 장사 안되면 문 닫아야겠다고 하시던데 돈 많은 사람은 더 비싼 것이 없어서 안달이고, 돈 없는 사람은 5만원하는 렌즈도 비싸서 못사는 형편이니 이것이 공평한 세상인지 불공평한 세상인지 가늠이 서질 않습니다.


몽블랑 만년필로 쓰면 글씨가 잘 써지고 파이로트 만년필로 쓰면 글씨가 안 써질까요? 저는 워낙 악필이어서 어떤 펜으로 써도 글씨가 꼴이 안 나서 여쭈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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