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君臨天下)의 꿈

2012. 4. 9. 21:03The 35mm Camera(마루 엮음)

 

 

 

 

 

 

 

무협지(武俠志)에 보면 늘 등장하는 10대 문파(十大門派), 혹은 91(九派一幫)이 있는데 소림파(少林派),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峨嵋派), 곤륜파(崑崙派), 점창파(點蒼派), 종남파(終南派), 청성파(靑城派), 공동파(共董派), 개방(丐幇)이 그들이다.

 

중국이 배경인 무협지는 어느 시대이건 간에 꼭 91방이 등장한다. 간혹 이들이 등장하지 않는 무협지도 있으나 그것들은 정통 무협이 아닌 비주류거나 마이너리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적어도 정통 무협이라고 하면 꼭 91방이 등장하고 이들의 무공이 판을 치게 된다. 이들 중에 가장 알아주는 것이 소림파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소림파의 제자가 무림을 제패하는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다른 방파 출신들도 기연을 만나거나 피나는 노력으로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되기도 한다.

 

91방에는 각기 그들을 대표하는 성명 절기(聲名絶技)가 있기 마련이고, 많은 제자들은 자기 문파의 무공을 절대적 경지까지 수련하여, 자신의 명예와 문파의 영광을 함께 높이는 최고수가 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이다. 즉 군림 천하(君臨天下)를 이루기 위해 모든 명운을 거는 것이다.

 

강호(强豪)에서는 강자만 살아남고 약자는 강자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무공을 닦는 것은 필수이고 남보다 강해야만 행세를 할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문파, 더 좋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선 문파가 강성하면 이름이 높으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고, 또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때에 더 좋은 무공이라야 남보다 앞서 나갈 것이며, 좋은 스승이라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림계에 전설처럼 떠도는 얘기 중에 소림사에는 달마 조사가 창시한 72종의 절기가 있다는 것인데 사실 어느 문파이든 간에 제자에게 가르칠 무공이 한두 가지뿐이겠는가? 많은 절기가 있어도 그것을 다 배울 수가 없고, 이것, 저것 여러 가지를 익히는 것은 하나에 몰두함만 못하기 때문에 명문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기 문파의 무공에 다 익숙하지는 못한 것이다.

 

소림파는 72종의 절기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반야신공(般若神功),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 나한권(羅漢拳), 탄지신통(彈指神通), 항마장법(降魔掌法), 달마검법(達摩劍法) 등이 유명하고,

 

무당파에는 태청강기(太淸剛氣), 태극권(太極拳), 태극혜검(太極慧劍), 오행검진(五行劍陣), 제운종(梯雲縱)을 알아주며,

 

화산파는 자하신공(紫霞神功), 복호권(伏虎拳), 육합검법(六合劍法), 매화검법(梅花劍法), 복호장법(伏虎掌法)이 뛰어나며,

 

아미파는 무상금광신공(無想金光神功), 소청검법(小凊劍法), 무상검식(無想劍式), 포옥검(抱玉劍) 등이 이름 높다.

 

곤륜파는 태청진기(太淸眞氣), 상청무상신공(上凊無上神功), 양의검법(兩儀劍法), 섬전수(閃電手),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알아주고,

 

점창파는 열양공(熱煬功), 현천진기(玄天眞氣), 북명신공(北溟神功), 사일검법(射日劍法), 칠절수법(七絶手法)을 내세우며,

 

종남파는 태을신공(太乙神功), 유운검법(流雲劍法),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태을신수(太乙神手), 천강지(天剛指),

 

청성파는 대라무위신공(大羅無爲神功), 청명심법(靑冥心法), 청풍검법(淸風劍法), 최심장(催心掌), 추운권(追雲拳),

 

공동파는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 소양신공(素養神功). 복마검법(伏魔劍法), 칠상권(七傷拳). 혼원장력(混元掌力)을 알아준다.

 

개방은 거지들의 집단으로 옥현귀진현공(玉炫歸眞玄功), 취팔선공(醉八仙功), 취팔선권(醉八仙拳),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파옥권(破玉拳), 타구봉법(打狗棒法) 등이 유명하다.

 

각 문파들은 이러한 무공들을 제자들에게 숙련시켜 세상에 내어보내는 것이다. 내공 심법(內功心法)이나 권법(拳法), 장법(掌法), 보법(步法), 검법(劍法), 도법(刀法) 등의 외공 초식(外功抄式)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그것을 익힐 자질이 안 되면 대성할 수 없는 것이고, 대성해서 계속 발전시켜나갈 뛰어난 제자가 없으면 그 문파는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무공에서는 외공보다 내공을 더 높게 평가했는데 그것은 아무리 초식이 좋아도 힘이 없으면 제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동등한 내공 실력을 지녔다면 그 다음은 외공 초식의 우위와 숙련이 중요하다.

 

이때에 이런 초식이나 숙련을 위해 필요한 것이 초식을 뒷받침할 주요 병기이다. 좋은 재질로 명공(名工)이 만든 훌륭한 검()이나 뛰어난 도[], 채찍[], 부채[], () 등은 고수들이 무공을 펼치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0대 병기(十大兵器)이니 10대 마병(十大魔兵)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다. 이런 뛰어난 병기를 지니면 그 병기의 이름만으로도 상대를 떨게 만들었고, 주인을 잘 만난 병기는 그 이름을 더욱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무공은 그 절정에 이르면 다 같다고 한다. 소위 만류귀종(萬類歸宗)이라고 어떤 경로로 올라가든 그 정점은 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명 문파가 아닌 무명 문파 출신으로 만류귀종에 이르면 얼마나 더 떳떳할 것인가?

 

이것은 강호나 무림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육체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다. 많은 나라들이 국력을 키우며, 많은 업체들이 기술 개발로 힘을 키운다. 비록 육체의 힘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약육강식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진기 산업에도 마찬가지이다. 한 때 세계 사진기 시장을 주름잡던 독일의 업체들이 힘을 잃어가고 이제는 일본의 업체들이 사진기 시장의 독무대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사진기 업체가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본 업체끼리도 피를 말리는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인 것이다. 사진기 업체의 10대 문파를 얘기한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라이카는 현재까지도 35mm 사진기의 살아 있는 전설이고, 칼 차이스는 2차 대전 이후에 그 이름이 퇴색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렌즈에서는 최고의 거장이며, 롤라이 역시 그 이름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코닥은 오늘의 사진이 있게 만든 사진의 산 역사이면서 살아 있는 전설이니 이들은 일본이 주름잡는 현재의 사진기 판도에서도 당당한 명문 정파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일본의 6대 메이커하면 니콘, 캐논, 펜탁스, 미놀타, 올림퍼스, 교세라이지만, 교세라 대신 야시카가 그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10대 메이커와 무협지에 나오는 10대 문파를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본다.

 

독일의 라이츠는 사진기를 얘기할 때 항상 맨 앞에 오게 되니 무림으로 본다면 소림파의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며, 무당파의 자리에는 일본의 니콘이 맞을 것이다. 무당파와 견줄만한 곳은 화산파이니 화산파의 자리는 캐논이 차지해야 할 것이고, 검술로 이름이 높은 아미파의 자리에는 미놀타가 어울린다.

 

멀리 곤륜산에 자리 잡은 곤륜파는 차이스 이콘이 어울리고, 점창파는 올림퍼스가, 종남파는 중원보다 먼저이니 SLR 사진기의 선구자인 펜탁스가 맞을 것이다. 공동파의 자리는 코닥에게 넘기고, 청성파는 롤라이에게 주면, 개방은 자연스레 야시카/콘탁스가 차지할 것이다.

 

이들 각 업체들은 자신들의 제품으로 군림천하를 꿈꾸며 가장 좋은 사진기, 가장 뛰어난 사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것이 최고의 비싼 사진기를 추구했든, 가장 저렴한 사진기를 목표로 했든 관계없이 가장 많이 사랑받거나, 가장 많이 팔리는 사진기를 목표로 했던 것이다. 소설 속의 10대 문파가 군림천하를 위해 절치부심을 한 것이나, 실재하는 메이커들이 세계 최고를 목표로 노력을 기울인 것이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많은 사진인들이 더 좋은 사진기를 가지려 노력하고, 사진기 메이커들은 사운(社運)을 걸고서 보다 나은 사진기를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이런 과정에서 사진기 역사(寫眞機歷史)에 이름을 날린 사진기와 메이커도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함께 해온 것이다.

 

독일에서 난립했던 수십 개의 사진기 메이커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이고, 2차 대전 후에 일본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났던 사진기 메이커도 이젠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만 살아남았다.

 

그래도 독일과 일본은 사진기를 얘기할 때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공업이 발달했다고 자랑하는 나라 중에 사진기를 자기 기술로 세계 시장에 내어놓은 곳은 다섯 나라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일과 일본이 부러울 뿐이다. 사진기를 소비하는 시장 중에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우리나라가 내어놓을 사진기는 겨우 콤팩트 사진기인 ʻ삼성 케녹스ʼ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우리나라는 1980년대가 되서야 세계 시장에 명함을 내어 놓았을 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시도하지 않은 일이지만 일본은 자신들이 사진기 업계의 최강자라고 믿어서 그런지 툭하면 ʻ사진기 명품 100ʼ이니, ʻ무슨 렌즈 100ʼ이니 하는 것들을 자주 선정한다.

 

나는 그런 선정이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별로 수긍을 하지 않는다. 어디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주로 일본 제품을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진기를 내어놓을 만한 나라는 독일과 일본밖에 없는데다가 독일은 이미 예전에 사진기 시장의 왕좌를 일본에 내어줬으니 일본 사람들이 사진기만큼은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라고 백번 양보하고 싶어도 배가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툭하면 무슨 기념으로 내어놓는 ʻ세계 명작 사진기 100ʼ은 내어놓을 때마다 다르고, 선정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내가 보기엔 지금 사진인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기기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꼭 100을 채워야 맛인가?

 

그래서 나는 요즘 사진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수긍할만하다고 생각하는 10대 사진기를 내 기준으로 선정했다. 그 중에는 아직도 100만 원이 훨씬 넘는 비싼 것도 있고, 3, 4만 원이면 쉽게 살 수 있는 저렴한 것도 있다.

 

사진기가 값이 비싸다고 해서 명기가 될 수는 없다. 저렴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팔리고 사랑받은 기종이라면 그 가격에 관계없이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된 사진기라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니며, 또 최신 기종이라고 해서 명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방송공사에서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ʻ광복 60, 가요 60ʼ을 기념하여 국민 가수 10명을 선정하였는데 남인수, 김정구, 현인, 배호, 이미자, 최희준,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이다. 이 중에는 오리지널 히트곡이 두셋도 안 되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내어놓은 음반마다 다 성공을 거둔 가수도 있고, 단지 몇 년 만 활동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50년 넘게 활동하는 가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10대 가수가 제대로 선정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더러는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불만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면면을 보면 무난한 선정이라고 본다. 가수 본인들도 자신이 10대 가수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불만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본인의 판단인 것이고, 남들이 인정할만한 선정임에는 확실하다.

 

개인적으로 아쉽기야 내가 좋아하는 이선희가 10대 가수에 선정되지 못한 것이지만 이선희가 10대 가수 반열에 들기엔 아직 멀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일 거다. 가수가 한 때 노래만 잘 한다고 해서 뛰어난 가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수라면 노래도 잘 해야 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을 받아야만 가요사(歌謠史)에 남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훌륭한 가수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넘는 가수 중에 10대 가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뛰어난 가수들이 등장하여 좋은 노래로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것이 어디 한 두 사람이던가? 마찬가지로 위에 열거한 사진기 업체만 좋은 사진기를 내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명문가에서만 호걸이 나오는 것은 아닌 것처럼 아주 뛰어난 사진기가 이름이 덜 알려진 메이커에서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10대 메이커와 10대 사진기를 다루고, 그 뒤에 명가(名家)의 명기(名機))로 다섯 업체를 더 선정하여 그들이 만든 명품들을 다룬다.

 

물론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내 선정 기준이 아주 객관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진기에 관심을 둔지 20여 년에, 사진기와 렌즈를 사고 바꾸느라 보낸 시간이 아까워 이렇게 정리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