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2002. 9. 15. 21:39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오늘 봉평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부터 봉평에 메밀꽃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신문과 잡지에서 많이 보았고, 오늘까지가 제 4회 효석문화제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 갔던 것입니다.
허생원이 하룻밤 인연의 성씨네 처녀를 평생 잊지 못해 20년 간이나 장날마다 찾았던 봉평은 이제 그 허생원 덕에 아니, 이효석 덕에 전국에 널리 알려진 메밀꽃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봉평에서 대화까지 80리 길을 밤새 걸으며 되뇌이고 되씹었던 물레방아간의 하룻밤 이야기...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80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 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가 꼼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하게는 안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맛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제가 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 지금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모습을 그리며 해마다 봉평을 찾아갑니다. 이미 허생원도 동이도 지금 사람은 아닙니다. 30년대가 배경이니 동이가 살아있다해도 90은 넘었을 것입니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을 봉평의 효석문화제는 지금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 중에 가장 내실있고 잘 되는 향토문화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평면의 인구가 3500여 명에 불과한데 이들 모두가 이효석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아낀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메밀꽃이 꼭 봉평에만 피는 것은 절대 아니고 메밀국수나 묵이 봉평에만 있는 것도 절대 아니지만 지금은 메밀의 대명사가 봉평으로 굳어졌습니다.
메밀꽃은 보기는 좋지만 사진으로는 그렇게 아름답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미 늦어져서 벌써 메밀이 여물고 있는, 꽃은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꼭 메밀꽃 때문에 봉평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늘 둔내로 해서 봉평에 가다가 태기산 정상 쪽으로 올라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날씨가 안 좋아서 사진은 별루였지만 그곳을 발견했다는 것 만으로도 흐뭇한 일입니다. 태기산 중계소가 있는 곳에서 왼쪽의 작은 길로 타고 올라가면 한참 더 올라가서 거의 정상까지 갈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라보면 사방이 다 보이고 조망이 좋아 안개를 잘 이용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봉평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이 진미식당입니다. 작은 동네서 가장 크고 그런대로 깨끗한 편이며 음식도 다양하여 봉평을 찾는 사람들이 누구나 들르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 집을 여러 번 갔는데 제 입맛은 그 집보다 동네 번화가 안 쪽에 있는 현대식당이 다 맞습니다. 아니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현대식당을 찾는다고 합니다. 옛날 스레트지붕에 아주 허름해 보이고 화장실도 지저분하지만 이 집 음식맛은 아주 괜찮습니다.
이름이 있다고 다 잘하는 것은 아니고, 이름이 없다고 못하는 것도 아닌 것은 음식 뿐만이 아닐 겁니다. 사진기와 렌즈. 사진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 이름값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디(ED)나 아포(APO)렌즈를 이름만 듣고 사서 찍어 본 분들은 그것들이 그 이름이나 가격만큼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 내공이라고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살아가다보면 이름없는 것들이 제 값을 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좋은 명절 되시고 즐거운 가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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