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부는 광야에 서서

2002. 11. 11. 21:25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세종로에 있는 교보빌딩의 광고문구가 늘 화제가 되고 있는데 요즘 것은 제가 외우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나무잎은 흙으로 돌아가야할 때에 비로서 경건해지며, 사람은 적막한 바람속에 서야 비로소 아름다운가?"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대로 옮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떨쳐야 본 모습이 보인다는 얘기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위에 얘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요즘 제 심정이 광야에 홀로 서서 삭풍에 떨고 있는 기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떨친 본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추위에 떨고 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작년에 2학년 부장, 올 해 3학년 부장을 맡아 2년 동안 동고동락을 해온 우리 620명 학생들이 수능성적이 기대이하로 나와, 학부모님들과 애들 보기에 민망할 따름입니다.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성적은 생각보다 잘 안나온 것 같아 얼굴을 들기가 부끄럽습니다.
아직 성적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비관할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찌 됬든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진기를 늘 들고 다니니까 여기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학교에 많은데 아마 성적이 좋지 않으면 제가 사진찍느라 애들에게 신경을 안 써서 그렇다고 생각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일요일에 사진을 찍는 것은 제 개인의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3학년 부장을 할 때에 연중무휴로 학교에 나와 애들과 함께 했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본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 나와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요일까지 학교에 나온다는 것이 자랑스런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애들 성적이 좋아진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무엇을 의식한 계산된 행동이라 생각하기에 저는 일요일에 사진찍으러 나갔습니다.
이제 저는 남의 눈치볼 일 없는 평교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부장의 책임을 맡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제게는 사진기 둘러메고 산야를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한 일입니다.
오늘 부석사 무량수전에 처음 들어가봤습니다.
부석사에 간 것은 오늘이 세번 째지만 무량수전안을 본 것은 오늘 뿐입니다. 거기는 특이하게 부처님이 전의 정면에 앉아 있지 않고 측면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절은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 전의 측면에 있는데 여기는 정면에 있어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부처님이 측면으로 앉아 있으니 그게 맞는가 봅니다.
얼마 전 수능 보기 전날, 학교에서 가까운 절에 가서 부처님께 108배를 올렸더니 온 몸이 알이 배겨 혼난 기억이 생생해서 오늘은 우리 학급의 학생 수만큼만 절을 하였습니다.
곤세음보살님을 한번 부르며 애 이름하나 부르고, 또 한번 부르며 애 이름을 부르고 하며 37명의 이름만 부르고는 나왔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제게는 사치스런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진기를 들고 파인더로 대상을 쳐다볼 때보다 더 좋은 것이 드므니 제가 사진을 쉽게 버리지는 못할 일일 것입니다.
이제 좀더 겸손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남에게 욕을 먹지 않으며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늘 광야에 서 있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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