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렌즈의 유혹

2003. 3. 24. 09:11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다른 사람들이 더 밝은 렌즈, 예를 들어 200mm f/2.8과 200mm f/4.0 에서 무엇을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내게 묻는다면 굳이 비싼 것을 살 필요가 있겠는가? 렌즈의 밝기와 사진은 큰 차이가 없다고 얘기하면서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4.0을 사라고 권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나 스스로도 그런 것인가는 솔직히 장담하지 못한다. 아니 돈만 여유있다면 당연히 2.8을 사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심리상태를 갖는 것은 밝은 렌즈에 대한 유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50mm 표준 렌즈의 밝기는 f/1.2, f/1.4, f/1.7, f/2.0 등으로 여러 가지가 나온다. 그 밝기가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가격은 크게 차이가 난다. 대개 한 단계가 밝아지면 그 가격은 배로 올라간다. 펜탁스 50mm f/1.2는 f/1.4보다 세 배 이상 비싸다. 물론 f/1.4는 f/1.7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싸고...
그런데 문제는 조금 더밝다고 해서 그만큼 성능에서도 차이가 있느냐하는 것이다. 광학적 특질로 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펜탁스에서 나오는 SMC-FA 렌즈는 f/1.4보다 f/1.7이 더 낫다고하는데 가격은 당연히 f/1.4가 더 비싸다.
작년에 가보카메라에서 라이카 180mm f/4.0을 110만원에 샀다. 그 때에 고민이 라이카 마운트의 앙제뉴 180mm f/2.3 APO 렌즈가 같은 값이면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앙제뉴 렌즈는 프랑스에서 만드는 것으로 주로 줌 렌즈로 유명한데 우리 나라에는 니콘 마운트의 것들이 많이 유통되는 실정이다. 둘의 가격 차이는 없어서 며칠 고민하다가 라이카 렌즈로 가져왔다. 그러다가 몇 번을 바꾸어 써보고는 앙제뉴 렌즈도 다시 가져왔다. 그러니까 라이카 마운트의 180mm 렌즈가 두 개가 된 것이다.
밝은 렌즈는 주로 인물을 찍을 때 쓰고 어두운 렌즈는 풍경을 찍을 때 쓰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늘 밝은 렌즈를 쓰는 것에 익숙해져 4.0인 라이카 렌즈는 몇 번 써보지 못했다.
엊그제 종로 4가 대광사를 지나다보니 라이카 180mm f/2.8과 180mm f/3.4 APO렌즈가 있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2.8은 190만원, 3.4APO는 230만원이란다.
그 렌즈들을 보니 불현듯 4.0과 바꾸고 싶었다. 그 얘기를 했더니 가져와서 바꿔가라고 하는데 아마 100만원은 더 줘야 가능할 것 같다. 몇 번을 생각해보고 고민했지만 쉽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집에 있는 펜탁스 MZ-3 바디를 팔고 1000mm 반사 망원 렌즈를 가져간다면 한 30만원만 보태면 가능할 것도 같고, 그냥 눈 딱 감고 카드로 긁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가보에서 만난 최구조씨에게 물었더니, 역시 전문가다운 대답을 한다. 입체감에서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굳이 비싼 것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밝은 렌즈는 일본의 상술이 만든 것이라고... 밝으면 초점 맞추기가 유리할 뿐 실제 성능 차이는 크게 없다는 것이다.
밝기에서 유리하면 초점을 맞출 때에 좋다는 것 이외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광학 전문가들의 하나 같은 주장이다. 그런데도 더 밝은 렌즈가 계속 나오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밝은 것을 찾는 소비자가 많으니 이미 한계에 다다른 렌즈시장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더 밝은 렌즈에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은 나 역시 마음 약한 사진인이어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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