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호 선생님의 전화

2001. 11. 10. 12:20사,사,사(예전 다음 칼럼에 올렸던 글)


 

 

내가 작년 이맘 때 객기를 부리느라 그동안 정리했던 원고를 가지고 "사진없는 사진 이야기"란 보잘것 없는 책을 하나 만들었다.
처음엔 여기 저기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해 보았지만 모두 거절당하여 오기로 자비 출판을 생각했다. 그래서 아는 곳에 문의했더니 300만원이면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책을 700부 찍었다. 여러 번 손을 봤어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나왔는데 특히 경비를 절약하느라 글자를 너무 작게 하여 두고두고 아쉬웠다.


책은 학교 선생님들과 우리 반 아이들, 그리고 아는 사람들과 찬조금을 주신 분들께 보내드리고 내가 100여 권 정도 가지고 있다.
가보카메라에서 많은 찬조를 받았고, 또 내가 아는 지식과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이 가보카메라에서 얻은 것이므로 별 볼일 없는 책이지만 가보에 50권을 가져다 놓았다. 혹 나를 아는 분들이 오시면 하나씩 드리라고 갖다 놓은 것이다.


그랬더니 며칠 안가서 책이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책 속에 여러 사진가들을 얘기했는데 그분들에게는 챙겨주지를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확인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잊어버리고 지났다.


얼마 전에 결혼식장에서 사진작가이신 고호 고창호 선생님을 만나 뵈었는데 늘 그대로 따뜻한 마음으로 반겨 주셨다. 그리고 헤어질 무렵에 명함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장을 주셨다. 마침 내가 주소를 몰랐는데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 선생님께 졸저 한권을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보내고 나서는 나도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전화가 선생님으로 부터 온 것이다.


선생님은 뇌출혈로 쓰러지신지가 꽤 오래여서 입이 많이 돌아간 모습이고, 귀도 보청기를 이용해서 들으시는데 전화로 통화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주 똑똑한 발음으로 책이 아주 좋다고 격려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많이 부끄럽고 무척 고마웠다. 감사드린다는 내 말씀에 언제 차라도 대접하시겠다고 하시며 말씀을 마치셨는데 그렇게 고마우실 수가 없었다.


내가 변변치 않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쓰고 옮기느라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아무에게나 그냥 선뜻 내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받은 사람들은 제대로 읽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자세하게 설명한 것도 다시 나에게 엉뚱하게 묻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책상에 올려 놓은 채 버리다시피 떠나기도 해서 내가 기분이 언짢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의 대가께서 그 하잘 것 없는 책을 다 읽으셨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물론 나도 남이 어렵게 쓴 책을 그렇게 우습게 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내가 쓴 것이 소중하다면, 남이 쓴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사람은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 철이 드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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